학원업계 사람들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지난 20일 오후 여의도공원 문화마당에서 열린 '학원교육말살정책 저지를 위한 전국학원교육자대회'에서 주최측인 한국학원총연합회는 이명박 정부의 사교육 말살정책에 강력대응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고 한다. 전국의 학원관계자 약 1만여명이 참석했다는 이 대회, 자칭 교육인이라고 이야기 하는 그들의 행동은 얼마나 교육스러웠을까?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바탕으로 이들에게 질펀하게 욕 한마디 해보련다.

소도 웃고 갈 자칭 교육인들의 투쟁

이들이 집회현장에서 떠들어댄 말들을 살펴보니, 유치하기 짝이 없다. 한 번 보시라.

노동계에서 분신하면 열사라고 부르는데, 학원계에서 열사 나오지 말란 법이 있느냐고 말했단다. 어디다 대고 자신들의 행동을 전태일에 비유하나. 과거 전태일 열사가 노동현실에 대해 고민했듯, 그들이 단 한 번이라도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면 몰라도. 돈에 환장해서 되도 않는 프로그램으로 학생들 꼬셔댔으면서, 무슨 선구자나 되는 양 거룩한 척한다. 그 거룩함으로 학원장하지 말고, 차라리 목사해라.
또 그렇게 분신해서 열사 소리 듣고 싶으면, 분신해라. 안 말린다. 분신하고 열사소리도 못들으면 정말 개망신이겠지만. 하지도 못할 일을 운운하면서 참여자와 상대방을 자극하는 일, 교육자의 바람직한 태도는 아닌 것 같다. 어디가서 교육업 종사자라고 명함도 내밀지 마라.

일본이 잘 사는 건 학원이 우리보다 5~6배 많아서 잘 살고 있고, 북한이 못 사는 건 학원이 없어서라고 이야기 했단다. 그럼 우리나라 경제성장은 학원이 있어서였구나. 사회 교과서 다시 써야겠다. 이런 몰상식한 강사들에게 교육을 맡기는 학부모들이 불쌍하다. 혹시라도 이번 집회에 참여하느라 자녀들의 학원이 하루 휴강했다면, 그 학원 당장 그만두시라. 학생들 걱정한다는 그들이 떠들어댄 말이 이 정도라면, 과연 내 자식을 맡길만 한지. 판단은 소비자의 몫이다.

칠천만 잠들었을 때, 학원 형제 깨어있었다고? 누가 깨어있으랬다고 투정인가. 정부가 시켰나? 그건 엄연한 시장원리에 따른 당연한 결과 아니었나. 또, 공교육 프로그램이 저렴해서 학부모가 몰려드는 것 역시도 가장 기본적인 시장원리에 근거한 일 아니던가. 그게 정 못마땅하시면, 저렴한 양질의 프로그램으로 승부를 거시던지. 요즘 방과후학교에 대한 학부모의 의견은 대부분 우호적이다. 학생의 만족도도 꽤 높다. 가격도 저렴하고, 또 나름 유익하기 때문이다. 학원과 비교해서, 억지로 학부모가 끌어다 놓는 것보다, 학생 스스로 선택하여 듣는 경우가 더 많다.

북한과 맞서 싸워 서울을 지켜낸 것처럼 정부에 맞서 스스로를 지켜내겠다니... 현 정부를 북한과 동일시하는 무모함은 적어도 현 정부에서만큼은 피하셨어야지. 정부파괴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한대도 딱히 할 말은 없을 것 같다.

"노무현 정부 5년만 견디면 좋아질 줄 알았더니, 더 심해졌다"고 말했다는 문상주 회장님, 그렇게 학원탄압하던 정부 여당에 공천받으려고 불철주야 뛰시던 때는 잊으신 모양입니다.

이래저래 하는 말들을 모아보니, 소도 웃을 소리를 가지고 아주 생쑈를 하신다. 학원업계가 요즘 무지 한가한 모양이다.

한편 이번 집회에 약 1만여명의 학원관계자가 모였단다. 이들 중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서울지역 사람들은 학원 하루 쉬는 낙으로 발자국 한번 찍고 도망갔을테고, 지방 사람들이야 공짜로 서울 나들이 한다치고 오지 않았을까. 과거 학원관계자들의 집회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한번 해보는 말이다. 그리고 생각해보자. 전국의 학원관계자가 얼마나 되는데, 단지 1만여명을 가지고 대표성을 운운하는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한심한 노릇이다.

위기의 대한민국 사교육, 어디로 가야 하나

한국의 사교육 시장이 위기를 맞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의 위기는 어린아이 곶감 빼먹듯 지금까지 쉽게 걸어온 길의 방향전환요구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교육은 공교육의 영역을 침범하여 공교육을 사정없이 유린해왔다. 과거 학과목 관련 사교육은 공교육의 영역이 미치지 못하는 곳(재수생, 검정고시생 등)에 한정되어 있었다. 또한 사교육은 예술감각을 기르기 위해 피아노를 가르치고, 미술을 가르치고, 발표력을 신장하기 위해 웅변을 가르쳤으며, 수학실력을 키우기 위해 주산을 지도했다. 과거 사교육 어느 구석에서도 지금처럼 대놓고 공교육의 학과목을 액면 그대로 가르치는 일은 없었다.

사교육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과거에 그러했듯이, 공교육의 영역을 대놓고 침범하는 구습을 버리고, 보다 창조적인 방법으로 학생교육에 이바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고민을 안해서 그렇지, 조금만 고민하면 방법은 여러가지로 나올 수 있다.

나는 지난 12년동안 학원강사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때문에 사교육의 현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정확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의 사교육은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는 의견에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나 그렇듯, 사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 영역은 예전 사교육이 그러했듯이, 공교육의 영역과 겹쳐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를 그대로 학원에서 대놓고 가르쳐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들의 말대로 세계에 한국처럼 사교육을 규제하려는 정부는 없다. 하지만, 세계에 한국처럼 재학생을 대상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를 그냥 대놓고 가르치는 사교육도 없다는 사실도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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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일제고사'라고 불리는 시험을 놓고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학생의 정확한 수준측정을 통해 학습저하를 방지하고자 한다는 것이 일제고사를 실시하려는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의 입장이고, 학생들에게 무한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바람직한 교육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른바 참교육을 실현하고자 하는 일부 학부모와 시민단체의 반론이다. 이런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교과부는 일제고사 시행을 강행하였고, 학부모와 시민단체는 고사 응시거부로 실력저지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순수한 열정으로 아이들과 호흡하던 젊은 교사 7명이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아이들의 '교육'을 놓고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 과정은 결코 '교육'스럽지 못한 것이 심히 유감이다. 어느 편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기 조차 민망한 일이 되어버렸다.

전혀 교육스럽지 못한 교육 논쟁

적어도 우리나라 안에서는 학생이 자신의 적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라면, 우선 학생이 공부를 잘 해야 하고, 집안의 경제력이 우수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공부를 못하는 학생의 적성과 창의성은 진지한 검증 논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채 '말짱 황'이 되어 버리고, 아무리 우수한 적성과 창의성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아니하면 그 역시 '도루묵'이 되고 만다.

이런 현실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인식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면, 교과부의 대책은 일제고사라는 전 근대적인 방식보다 더 세련되고 참신했어야 한다. 어설픈 일제고사로 불을 보듯 뻔히 보이는 학생과 학교의 서열화를 이루느니 차라리 중,고교 평준화 정책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국제중 설립 강행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면, 현 정부의 중,고교 평준화 정책의 지속 이행 의지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성적과 경제력으로 적성과 창의성의 우수함을 진단하려는지. 이것을 교육이라고 해야할 지 의문스럽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적성과 창의성보다 우대받는 성적과 경제력

매년 학기 초마다 강의 현장에서 내가 학생들에게 물어보는 한 마디가 있다.

'너희들 전(前) 학년에서 어디까지 배웠니?'

학기초에 그냥 교과서 처음부터 나가면 되지 이게 무슨 어처구니 없는 짓인가 싶어도 어쩔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은 이전 교과내용을 다 배우지 못하고 다음 학년으로 올라오기 때문이다. 사교육 현장에서는 학생 승급에 대한 절대 기준을 성적에서 찾는다(물론 학부모의 입방아에 좌우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공교육 현장의 학생 승급 기준을 '출석일수'에 맞춘다. 게다가 학교는 합창대회, 체육대회, 소풍 등 각종 행사로 수업일수를 갉아먹는다. 여기에 격주 토요휴무제까지 겹쳐 학생들의 수업일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상황이 이런대도 학교는 교과 내용을 온전히 다 가르쳐주지 않는다. 대단원 한 두개 정도 지나치는 건 기본이다. 그러다보니 학생들은 1학년 내용을 다 배우지 못하고 2학년으로 올라오고, 또 2학년 내용을 다 알지 못한 채 3학년으로 올라간다. 학부모들은 학원교재가 한쪽만 덜 풀려있어도 학원으로 부리나케 전화질을 해대면서 공교육 현장의 나태함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정도는 달라도 교재비, 수업료 받는 건 다 같은데 차별이 심하다.

일제고사는 이러한 공교육의 나태함을 상쇄하는 순기능을 가지고 있다. 연합고사를 실시하는 비평준화 지역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평준화 지역 학생들보다 우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중등과정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고등과정을 온전히 이수했다는 실증이 되어야 하는데 이같은 상황이라면 교육의 질적 저하를 막을 길이 없다. 날로 기승을 부리는 심각한 공교육의 나태함을 해소하려면 일제고사는 반드시 시행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공교육의 나태함

일제고사 형식의 시험이 꼭 필요하다면 그것이 지금처럼 단순 서열화로 학력을 측정해서는 곤란하다. 반대로 일제고사를 반대하려면, 그 역시 단순서열화 이외의 다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교과부가 일제고사의 폐단을 모를리 없고, 그 폐단을 감수하고서라도 시행하겠다고 하는데는 분명 다른 이유가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현 정부에 상식을 기대하기 힘들지만 상식선에서 생각하면 그렇다.).

그런데 지금 드러나고 있는 일제고사에 대한 찬반논쟁은 자기성찰은 없고 남 탓하기에만 급급해 보인다. 교과부는 일제고사를 명분으로 학교와 학생을 길들이려는 구태를 반복하려는 건 아니었는지, 학부모들은 정말 두려운 것이 서열화로 인한 학생들의 의욕저하인지, 아니면 자기 자식이 1등 혹은 상위권이 아니라는 열패감인지부터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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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학생들은 공부를 하기 싫어한다. 공부하기 좋아하는 학생이 어디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예전 사람들은 공부를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당위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출세를 위해서,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사람들은 공부를 해야만 했고 또 그렇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요즘 학생들의 공부에 대한 혐오에 그같은 당위는 포함되어 있지 않아 보인다. 특히 공부는 형식적으로 하면서 부모의 경제조건에 편승해 웬만한 성인만큼의 지출을 서슴지 않는 학생들을 보면 '내가 너 같아도 공부 안 하겠다'는 멍청한 생각이 절로 들 때도 있다.

학생들은 왜 공부를 싫어하나

상황이 이렇다보니 공부란 학생들에게 단순히 출세를 위한 최소 만족 조건이지 생활을 위한 필요 조건이 아니다. 보다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넉넉히 배우려는 학생들은 멸종된 지 오래이며, 기성세대가 세워놓은 진학을 위한, 취업을 위한 최소조건을 채우기 위해 학생들은 아무 생각없이 공부해 주고 있다.

요즘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다수가 부모나 학교,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 만족 조건 이상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영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은 많다. 하지만, Native Speaker처럼 영어를 구사하고자 덤비는 학생은 없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TOEIC, TOEFL점수가 남들 보기에 높아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Native Speaker수준의 영어구사는 외국생활을 거친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인식하는 까닭에 한국에서 영어를 공부한 사람들이 연음이라도 사용할라치면, 그건 외국도 안 다녀온 놈의 주제 넘은 '잘난 척'이 되고 만다. 학교 성적도 학부모의 심리적 마지노선인 90점을 넘으면 일단 안심모드에 접어든다.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는다.

사실 따지고보면 이것은 비단 요즘 들어 벌어지고 있는 천태만상은 아니다. 2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우리의 모습은 늘 이랬다. 그러다보니 요즘 애들만을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어른들이 문제다. 공부를 재미없게 만들어 놓고, 재미있어 하란다. 이쯤 되면 제 정신으로 공부하는게 이상한거다.

영어를 잘하고 싶지만, Native Speaker가 되고 싶지는 않은 이유

얼마 전 서울 강남 교육청은 10월부터 관내 초등학생에게 한자 교육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학부모의 반발이 거세다. 그런데 그 이유가 참 어이없다. 사교육 부담이 가중된다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였다. 학부모들은 왜 모든 교육을 사교육에 의지하려는 관성을 버리지 못하는지, 왜 그 지긋지긋한 지옥 속으로 사랑스런 아이들을 몰아넣는지 모르겠다. 학생들로부터 재미있게 공부할 권리를 빼앗은 죄를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는지 궁금하다. 매일 사교육 근절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자녀들을 자신의 장신구처럼 이용하고자 사교육에 몰아넣는 어른들이 존재하는 한 학생들의 공부에 대한 혐오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공부도 하고 싶은 사람만 해야 한다. 남의 인정을 얻기 위해 공부해서도 안된다. 또 배우려면 최소 만족 수준만 채우려는 얄팍한 학습보다 제대로 완벽하게 배우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자만 배워야 한다. 그것은 공인 인증과 별개로 검증할 수 있는 그야말로 제대로 된 실력이어야 한다.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추려면 공부의 목적이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한 시험이어서는 곤란하다. 어떤 이유에서건 공부의 목적이 그런 시험이 되는 순간, 그 때부터 공부과정은 지옥이 되어버린다.

재미있게 공부할 권리를 빼앗은 학부모들

많은 학생들이 믿으려 하지 않지만 공부는 즐거운 것이다. 지옥같은 공부만 해 온 학생들이 이 말을 믿을리 만무하지만, 새로운 미지의 사실을 알게된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우리가 실제 능력의 향상을 외면하고 지금처럼 껍데기 스펙에 연연하는 한 공부는 늘 고문이다. 또 남에게 인정받으려 쌓는 실력따위로 발전을 기대하는 건 그야말로 억지다.
진정으로 실력향상을 위해 배움에 임하는 학생은 멸종되고 만 것일까? 그런 학생이 있어야 배우는 입장이나 가르치는 입장 모두 신나고 흥겨울텐데 말이다. 가르침과 배움은 함께 자란다는데, 발전없는 배움은 발전없는 가르침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이 땅의 학부모들, 정신차려라. 오늘날 교육이 이모양이 된 건, 애들 탓도 아니고, 정부 탓도 아니고, 바로 당신들 탓이라는 걸 명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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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6년전, 중학생 신분으로 내게 사회수업을 들었던 한 녀석과 연락이 닿았다. 올해 대학에 진학해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있는 그는, 아직도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순간에서만큼은 6년전 중학생 때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다음은 그와의 대화 중 일부.

"선생님, 한번 꼭 찾아뵐께요. 스승의 날도 머지 않았는데..."
"학원강사가 무슨 스승씩이나.... 난 너희들한테 은인이라기보다는 죄인이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그 사람이 스승인지 아닌지는 제자들이 판단하는 거 아닌가요?"

녀석의 꽤 당돌한 발언에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예전같지 않은 내공에 허를 찔린 것이다.

오늘은 27번째 맞이하는 스승의 날. 매년 이맘 때가 되면, 아이들은 평소에 안하던 일들을 아무 스스럼없이 하곤 한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선물을 내놓기도 한다. 학생뿐만이 아니다. 학부모님들도 이런 흐름에 동참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학원강의 11년차인 내겐 아직도 이같은 인사가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학원강사의 스승대접이 달갑지 않은 이유

앞선 대화의 내용에서처럼, 난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들에게 '제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때로는 참 민망하다.)에게 은인이라기보다는 죄인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그 이유는 학원강사인 나는 성장의 기쁨을 배워야 할 아이들에게 승부의 냉정함을 이유로 그 기쁨을 외면하게 만든 장본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학원이 학교와 다른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학교는 사람이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계량하는 것보다, 얼마나 바르게 성장했는가를 생각한다. '교육'을 목표로 한다는 말이다. 성적의 높고 낮음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교육에 있어 이것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학습의 결과보다는 그 과정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학원은 성적의 향상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적의 향상이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학원 역시 교육의 장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학원에서 말하는 성적의 향상은 '성장'이 아닌 '승부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부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내도록 강요한다. 작년 김포외고의 입시부정을 비난하면서도 올해 해당 학원으로 학생이 몰리는 기 현상(?)은 치열한 승부에서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 학원의 역할이라는 공감대가 암암리에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회에서, 좋은 결과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학원에게 그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이렇듯, 학교와 학원은 같은 일을 하지만, 그 목적과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다. 쉽게 말해서, 학교에 입시에서의 승리를 주문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며, 학원에 인성교육을 주문하는 것도 마땅한 일이 되지 못한다. 다시말해, 학원강사는 '교육자'가 아니라, '승부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승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참 밝고 푸르게 자라야 할 아이들 앞에서 승부의 세계에 대한 냉정함을 가르치는 내게 '스승'이라는 단어는 정말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학교와 학원, 교육과 승부의 갈림길에서

사실, 내가 가르치는 교과목의 지식은 살아가는데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스스로 삶의 목적의식을 바로 갖는 일,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장의 아픔을 감내하려는 노력을 잊지 않는 것이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목적의식만 바로 갖는다면, 지식의 습득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게으른 사람도 굶어죽지 않는 걸보면, 살아가는데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밥이 아니라 살고자 하는 절실함이다.

선생님이라고 하면, 고상히 말해 스승이라고 한다면, 그런 목적의식을 갖게 해주는 이여야 할 것이다. '나는 과연 내게 배우는 아이들에게 그런 삶의 절실한 목적의식을 심어주는 사람이었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가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는 건 정말 민망한 일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스승이고 싶다.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든 그 아이의 말처럼 스승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제자의 몫이라면, 난 그들에게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의미있는 존재이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흔히 학원강사를 단지 '지식장사'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장사할만큼의 지식은 아무나 갖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찌보면 축복이다. 그 축복을 사회에 공평하고 바람직하게 배분하는 일, 그것이 학원강사가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자의든 타의든 그동안 아이들에게 승부를 가르친 것에 대한 속죄를 지금부터라도 해야겠다는 다짐을 가져본다. 푸른 5월의 스승의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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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한 달여만의 포스팅이었는데 이렇게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넉달 반동안 25,000여명이 오셨던 블로그에 어제 하루만 46,000명이 넘게 오셨더라구요...;;;
여러분들의 응원 덕분에 오후,저녁 내내 두근두근,콩닥콩닥... 기분좋은 감동의 하루였습니다.^^
'그 사람의 스승여부는 제자가 판단한다.'는 명언을 해준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려줬더니, 비명을 지르며 기뻐하더군요. ㅎㅎㅎ
관심을 가져주시고,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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