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종일 눈에 띄는 야구관련기사는 어제 대구에서 열린 한화-삼성 전 5회초에 나온 채태인 선수의 '본 헤드 블레이(Bone-head Play)'였다. 경기를 지켜보던 나마저 어이가 없을 정도였으니, 경기를 직접 뛰던 선수 감독들은 그 심정이 어땠을까.

 

큰 바운드의 내야 땅볼을 민첩하게 잡아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잡으면서 그것이 땅볼이 아닌 플라이로 착각하지 않았었나 싶었을 정도로 채태인 선수의 플레이는 안일했고, 게다가 1루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장난스럽기까지 했으니 가뜩이나 좋지 않은 초반성적 탓에 분을 삭이고 있던 삼성 팬들의 분노가 폭발했음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플레이, 채태인 선수만의 잘못일까.

 

채태인의 본 헤드 플레이, 채태인만의 잘못인가

 

2년째 사회인 야구를 통해 직접 야구를 하는 입장에서 경기를 관전해보니 막연히 관중으로 즐기던 때와는 또 다른 시각이 생기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채태인 선수의 플레이는 선수의 입장에서도 몇 번이고 되풀이 해서 보았다. 크게 튀어오른 공을 채태인 선수는 민첩하게 대쉬해서 잡아냈다. 그 순간까지는 너무도 빠르고 좋았다. 다른 선수들 같았으면 정상 수비위치에서 체공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채태인 선수의 순발력은 체공시간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1루로 향했고, 천천히 오는 걸음을 알아채고 김경언 선수는 중간에 전력질주를 시작한다. 그리고 간발의 차로 세이프 선언을 받는다.

 

사실 포구했을 때까지만 해도 시간은 너무나 충분했다. 천천히 뛰어도 좋을만큼. 하지만, 그 순간에 채태인 선수는 타자주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이것이 첫번째 잘못이며, 가장 큰 잘못이다. 팬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채태인이 아닌 다른 선수가 1루를 보고 있었다면, 상황이 달랐을까. 꼭 그렇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음 사진을 보자.

 

5회초 한화 김경언 선수가 채태인 선수의 느린 이동을 틈타 1루로 대쉬하고 있다. (사진=네이버 스포츠 영상 캡쳐)

 

위 사진은 당시 상황에서 김경언 선수가 가속을 내기 시작한 순간을 정지시켜 캡쳐한 것이다. 채태인 선수는 타자를 등지고 있어 타자의 움직임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타자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선수들은 타자의 주루에 집중했어야 한다. 화면 상에는 투수 배영수 선수와 2루수 손주인 선수가 나오는데, 타자 주자가 가속을 내는 순간, 둘 중 어느 누구도 1루수에게 콜 사인을 주지 않는다. 고함소리 하나 나오지 않는다. 1루수 뿐만 아니라 투수와 2루수도 1루수의 플레이만 쳐다볼 뿐, 타자에 집중하지 않는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하지만, 간발의 차로 세이프된 상황이었음을 생각하면, 콜 사인 하나만 있었어도 타자 주자는 아웃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이 순간에 타자주자에 집중하고 있었던 삼성의 수비진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얘기다. 투수 배영수 선수와 2루수 손주인 선수에게 묻는다. 그 순간 그대들은 타자주자에 집중했었나. 그대들은 정녕 그 실수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만약 그렇다면, 그대들은 야구 선수가 아니다.

 

1루수를 제외한 나머지 야수들은 왜 타자주자에 집중하지 않았나

 

야구에서 타자 주자에 신경을 써야 하는 건, 공을 잡고 있는 야수만의 책임은 아니다(라고 말하기 민망할만큼 이건 기본이다.). 그럼에도 네티즌 야구팬들은 공을 잡고 천천히 가다 주자에게 역전당한 1루수는 만고의 역적을 만들어 놓고, 1루수가 알아서 잘 하겠거니 하고 수수방관한 나머지 야수들은 비난하지 않는다.

이것은 현재 삼성라이온즈의 팀 내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상황에서 채태인 선수는 단지 얼굴마담일 뿐이며, 당시 모든 선수의 상황이 채태인 선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사람들에게는 채태인 선수의 본 헤드 플레이로 기억되겠지만, 이것은 채태인 선수가 아닌, 삼성라이온즈의 본 헤드 플레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가 본 것은 채태인의 본 헤드 플레이가 아닌 삼성라이온즈의 본 헤드 플레이

 

야구 팬이라면 모두가 잘 알듯이 삼성라이온즈는 12년 연속 프로야구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저력의 팀이다. 그들의 플레이가 주춤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전력은 4강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만큼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팬들은 이겨서 우승하는 야구만큼이나 최선을 다하는 야구를 좋아한다. 안일하고 심심하게 얻어지는 우승보다, 땀흘려 노력해서 일구어낸 탈꼴찌에 팬들은 더 큰 환호를 보낼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삼성이 하루 속히 '디펜딩챔피언'이라는 부담감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올 시즌 초반 부진이 류중일 감독의 '2년차 징크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2년차 징크스라는 것이 결국 '처음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과 욕심이 빚어낸 필연이다. 모든 코칭스탭과 선수들이 지난 일은 다 털어버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해 주기를 바란다. 페넌트레이스 우승, 한국시리즈 우승, 아시안시리즈 우승은 이미 과거가 되었다. 지금 삼성은 페넌트레이스 8개구단 중 7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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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이 학생식당의 밥값을 외부인에게만 올려받기로 해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한다. 물가상승에 따른 부담과 다수 외부인의 이용으로 재학생 이용에 불편이 많다고 판단한 결과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외부인에 대한 차별이며, ‘그릇된 특권의식이라고 저항하는 여론도 만만찮은 것 같다. 사립대도 하지 않는 일을 국립대가 하고 있다는 비난도 눈에 띈다. 다른 대학이면 그냥 넘어갈 일을 서울대이기 때문에, 국립대이기 때문에 비난받는 것 같아 조금 씁쓸하다.

우선 특정 집단을 위해 조성된 복리혜택을 단지 접근에 장애가 없다는 이유로 접근하여 이용하는 것을 묵인하지 않겠다는 것이 과연 차별인지, 구별인지부터 정립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비슷한 의미라도 규제와 탄압은 구분되어야 하듯, 차별과 구별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대 생협의 조처는 차별이 아닌 구별로 개념짓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이 설사 차별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차별의 명분과 정당성을 충분히 내재하고 있는 것이기에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또한 이같은 차별같은 구별이 이루어지는 곳이 서울대 학생식당 뿐만은 아니다.

 
대학시설의 외부인 이용제한, 차별같은 구별

공직자 인사청문회를 지켜보다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슈 중 하나가 대상자 자녀의 과거 이중국적 보유문제다. 공직 대상자들은 대개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유학시절 결혼도 하고 출산도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속지주의(屬地主義) 국가여서 부모의 국적을 불문하고 자국에서 태어난 아이에게는 무조건 시민권을 발급해준다. 그런데 이 시민권이 가지는 혜택과 영향력이 무척 막강하다. ‘애국심을 명분으로 거부하기엔 그 시민권을 통해 얻는 경제적 이익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합법적이다. 그래서, 이 특권을 거부하기 어려워진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도덕성의 잣대로 가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언론에서 자녀의 이중국적 문제가 불거지면, 여론은 왜 그 혜택을 포기하지 않았느냐며 비난을 일삼기는 하지만, 유학생에게 자국 학생보다 2배의 등록금을 당연하게 부과하는 미국의 정책에 대해서는 불합리하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유학생은 외국에서 자국학생보다 2배 더 많은 등록금을 내고 고생고생해서 공부하는데, 우리나라에 유학 온 외국인들은 한국학생과 똑같이 등록금 내고 똑같이 대우받으며 공부한다.

입학은 또 얼마나 쉬운가.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입학허가를 얻으려면, 학비는 물론이려니와 체류기간동안 생활비까지 모두 보장되었다는 증명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외국학생의 경우는 자국에서 고등학교 졸업했다는 인증만 있으면 정원 외 특례로 대부분 입학이 허용된다. 그가 실제 얼마큼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수능시험을 통해 재단되는 한국 학생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외국학생들은 훨씬 더 나은 혜택을 받는다. 현대판 사대주의(事大主義)는 이런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국내 대학의 외국 학생 특혜, 현대판 사대주의(事大主義)는 아닌지

위의 두 사례는 최근 반값 등록금으로 대표되는 대학운영문제에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대학시설의 외부인 사용은 대학의 지역사회 공헌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외부수요를 감안한 시설의 확보나 서비스 개선을 위해서는 별도의 재원확충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재학생을 위한 시설에 외부인 사용을 허가하면서 재학생의 불편에 대한 부담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이다. 외국 유학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외국 유학생은 그들이 제 아무리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 학생보다 더 많은 서비스를 필요로 한다. 수업시간에 교수들이나 동료 학생들도 그들의 성과에 매우 관용적이며, 심지어 시험을 치르는 중에도 사전의 지참, 사용이 허가되기도 한다. 결국 같은 등록금을 내고 한국 대학생은 차별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도 미국처럼 외국 대학생들에게 한국 학생보다 훨씬 높은 등록금을 받아서 한국 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을 줄여주거나, 학교 시설의 외부인 사용을 허락할 정도의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면 어떨까? 같은 맥락에서 국민 정서상 아직 금지되고 있는 기여입학제도 도입을 검토해보는 것은 어떨까? 무분별한 차별은 인권을 유린하지만, 명분이 확실하고 타당한 구별은 더 나은 서비스 제공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반만년 역사의 단일민족국가임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국력의 허약함을 이유로 지금까지 그 자랑스러운 단일민족에게 오로지 희생만을 강요하지는 않았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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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계의 큰 별이 또 졌다. 최고의 철완을 자랑했던 최동원 前 한화 이글스 2군 감독. 선수로서는 화려했으나, 지도자로서는 그렇지 못했던, 어찌보면 故 장효조 감독과 야구인으로서의 삶의 궤적을 같이하던 또 하나의 레전드가 우리 곁을 떠났다. 일주일 간격으로 떠나간 이들을 바라보는 야구팬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애도와 슬픔 이상의 뭔가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런 야구팬들의 순수한 마음과 전혀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이도 있다. 이들의 소속구단이었던 롯데의 움직임이 대표적이다.

레전드를 향한 팬심에 역행하는 롯데

레전드의 타계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롯데 구단에 대한 유감은 이미 지난 포스팅을 통해 표명한 바 있다. 오늘 故 최동원 감독의 부고를 접하고서도 롯데의 태도는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최동원이 누구인가. 그는 명실상부한 롯데야구의 상징이다.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았던 열정있는 프로선수였고, 최고의 자리에서 늘 낮은 자세로 어려운 야구계의 맨 바닥을 걱정했던 그였다. 최동원을 이야기 하지 않고는 지금의 롯데야구, 오늘의 부산야구를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오늘 롯데구단의 발표는 그야말로 야구팬들을 아연실색케 한다. '명예감독 임명'과 '최동원데이 지정'을 검토한단다. 그가 병 중에 있을 때 거들떠도 보지 않던 구단에서 그의 부고가 닿기 무섭게 발표한 내용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이없고 기막힌 발표가 아닐 수 없다. 누구를 위한 명예감독 임명이며 누구를 위한 특별일 지정인가. 롯데에겐 레전드의 죽음이 하나의 기획상품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지. 그것도 임명하고 지정하기로 한 것이 아니고, '그럴까 검토중'이란다. 팬들의 반응을 지켜보자는 일종의 '꼼수'. 이건 레전드는 둘째치고,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게다가 홈페이지에 올라온 고인의 추모배너는 1주일 전 삼성 홈페이지에 올라온 故 장효조 감독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롯데,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

비록 삼성에서 은퇴했지만, 최동원의 이름 석 자는 롯데의, 더 나아가 한국 프로야구의 레전드라는 사실(설령 그가 프로야구 30년 레전드에 선정되지 못했다 하더라도)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롯데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말없이 쌓아왔던 그의 족적을 헤아릴 수 있을까. 1984년 롯데의 첫 우승은 최동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이런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데, KBO는 그가 소속구단이 없어 장례진행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우왕좌왕 했고, 직전 소속구단인 한화가 장례절차 논의에 발벗고 나섰다. 롯데의 레전드, 부산의 레전드, 한국 프로야구의 레전드 최동원이 가는 길 어디에도 롯데는 보이지 않는다.
고인의 죽음이 그저 상품으로만 보이는 이들에게 예의를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그래서 명예감독 임명 검토라는 뉴스에 감지덕지(?)해야 할 입장이지마는, 이것 하나만은 제대로 알고 가자. 최동원 감독에게는 명예감독 임명보다 영구결번부터 선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아나?
 
명예감독 임명 이전에 영구결번부터 선행해야

故 최동원 감독의 장례를 한화이글스가 준비한다는 소식은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레전드를 대하는 롯데의 자세가 얼마나 형식적이고 관념적인지 보여준다. 때문에, 그들이 고인을 명예감독으로 임명한대도, 그를 위한 기념일을 지정한다고 해도 진정성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물론, 그들에게는 레전드의 죽음보다 현재 2위를 달리고 있는 팀 성적이 더 중요하고 가치있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누차 강조하는 바, 고인 없이 오늘의 롯데자이언츠가, 오늘의 한국 프로야구가 존재가치를 잃는다는 사실 앞에서는 적어도 겸허히 고개 숙일 줄 아는 것이 인간된 도리가 아닌가 여겨진다.

고인의 넋을 위로하지는 못할 망정, 고인의 죽음을 상품화 하려는 후안무치함을 보이고 있는 롯데 구단의 반성과 사과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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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성이 강한 뉴스일수록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당히 크다. 어제 장효조 삼성2군 감독의 갑작스런 부음은 그래서 우리를 더 놀라게 했다. 지난 7월23일 올스타전에서 프로야구 30년 레전드 행사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그였고, 투병소식이 알려진 것이 그로부터 한달이 지난 8월22일이었음을 생각할 때, 갑작스런 그의 부음은 故 최진실의 죽음만큼이나 야구 팬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故 최진실의 죽음만큼이나 충격이었던 장효조 감독의 부음

진정한 프로의식을 가지고 있던 선수를 꼽으라면 악바리 이정훈이나, 큰 부상을 딛고 당당히 재기한 박정태를 꼽는다. 하지만, 프로야구 원년부터 쭉 야구를 지켜봐 온 내 눈에는 고인만한 프로선수가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장담한다. 구단으로부터 처절하게 내쳐진 다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었음에도 당당히 재기에 성공하는 것은 신체적인 부상을 이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트레이드가 선수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지대함으로 트레이드 후에 제 기량을 발휘하는 선수가 거의 없다시피했던 당시, 장효조 선수의 재기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음을 보여준 것이다. 게다가 재기에 성공했을 때, 그의 나이는 36세. 당시로서는 감히 꿈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열악한 신체조건을 극복하고 기록으로 보여준 그의 기량은 그보다 월등한 조건의 현역 선수들이 즐비한 현재도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것이다(고인의 기량과 비교하면 요즘의 '용큐놀이'는 그저 장난이다).그는 프로야구 전체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위대한 레전드였다.

이런 레전드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어제 모든 프로야구 선수들(게임이 없었던 롯데, KIA 제외)은 경기 전 고인을 추모하는 행사를 간단히 가진 후 게임에 들어갔다. 특히 고인의 소속구단인 삼성은 모든 선수들이 유니폼에 근조리본을 달고 나왔다. 그러나, 고인이 프로야구의 레전드라면, 그에 대한 추모도 특정구단에 한정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왜 근조리본을 달고 경기에 임하는 구단이 삼성 뿐이어야 하나. 더군다나 고인이 4년동안 선수로 뛰었으며, 은퇴 후 7년간 코치로 몸담았던 롯데가 경기가 없었던 어제는 둘째치고 경기를 치르는 오늘 마저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것은 야구 팬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로야구 30년 레전드의 갑작스런 타계, 근조리본은 왜 삼성만 달았나

레전드라고 한 자리에 모아놓고 반지 전달하고, 핸드프린팅 해주면서 치켜 세워주는 게 전부가 아니다. 진정 레전드이며 존중받아야 할 선배라고 생각한다면, 그가 어느 구단 소속이었든 상관없이 프로야구 전체가 존중해야 한다. 삼성을 제외한 프로야구 구단의 故 장효조 감독에 대한 태도를 지켜보며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들이 고인을 진정 레전드라 생각하고 있는지. 그 레전드라는 용어가 특정구단에 한정된, 말 뿐인 것이라면, 지난 7월 공연히 옛 사람들 불러 그렇게 장난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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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트윗을 통해 작은 언쟁이 있었다. SBS-ESPN의 양준혁 해설위원이 지난 주말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두산-SK전을 중계하면서 SK와이번스의 이만수 감독대행을 '이만수 감독'이라 호칭한 것에 대해 사과를 요구한 것이 언쟁의 발단이었다.

양준혁 해설위원은 트윗을 통해 두 차례에 걸쳐 사과의 뜻을 밝혔지만, 트위터리안의 흥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서 들은 건 많아가지고) '공식사과'를 요구했다. 트윗을 통해 두번이나 사과의 뜻을 밝힌 사람에게 공식사과라니.... 이 사람들은 지금 뭘 원하는 걸까.... 불편한 진실은 여기서 끝내는 게 옳았다.

나는 그들에게 감독과 감독대행이 호칭이 다를 뿐 그 역할은 동일하며, 선수입장에서는 그 차이를 느낄 수 없는 문제로 해설위원이 호칭을 잘못 썼다고 해서 해설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용인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또한 감독대행을 맡기 전까지 2군에서 감독을 맡고 있었던 이만수 감독대행에게 감독 호칭을 사용하는 건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작위적이거나 의도적인 일이 아니었다.

2군 감독이던 이만수 감독대행에게 감독호칭, 그리 큰 잘못인가

이러한 내 입장에 대해 나와 언쟁을 벌였던 트위터리안들은 '잘못된 걸 고쳐달라고 얘기도 못하느냐'고 말했다. 물론 그렇다. 잘못된 건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팬으로서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예의를 갖춘 정중한 모습이어야 한다. 하지만, 트윗을 통해 양준혁 해설위원에게 시정을 요구하는 이들의 모습은 예의바른 모습이라 판단하기 어려웠다(물론 개인적 견해이다). 양준혁 해설위원의 실수가 습관을 통해 빚어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팬들은 조금 더 너그럽게 기다릴 줄 알아야 했다.

또한 이들은 거듭되는 시정요구에도 불구하고, 양준혁 해설위원이 이 점을 시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불만으로 들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한 마디로 인해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사는 것 같다. 그래서, 자기가 옳다고 얘기하는 것은 옳아야만 하고, 자기가 틀리다고 하는 것은 틀려야만 하며, 그래서 그것을 지적하고 인정을 받는 것으로 아주 큰 보람과 긍지를 갖는 모습을 종종 본다. 양준혁 해설위원은 자신의 표현으로 팬들이불쾌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과했다고 쉽게 고쳐질 문제는 아니었다. 머리 속에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수 차례 되뇌이면서도 습관적으로 나오는 말과 행동이 우리에게도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이렇게 해달라' 하면 기계처럼 바로 그렇게 해주는 사람을 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반영되지 않으면, '몇번이나 시정을 요구했음에도 들어주지 않았다'며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팬을 위한 야구를 하기 위해서는 팬 스스로가 그 서비스를 받을 만한 인격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팬들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 지적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방법에 있어서 팬들은 지나치게 이기적이었고, 비 인격적이었다. 반론이 있을 것이지만, 옆에서 지켜 본 내 느낌은 그랬다. 올바른 지적이 비 인격적 시정요구로 빛을 잃고 만 것이다.

올바른 지적, 비 인격적 시정요구로 빛을 잃어

물론, 이만수 감독대행에게 감독 호칭을 쓰는 것이 김성근 전 감독의 자리를 뺏은 것 같은 박탈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특정 팀을 응원하든, 특정 선수를 응원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팬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러한 응원의 열기는 모두 '야구'라는 하나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야구가 존재하기에 SK라는 팀도 의미가 있고, 김성근 감독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했다고 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달려드는 일이 야구 전체를 망가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자기 편을 들어주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지금 이런 모습을 김성근 감독이 기뻐할 지.. 솔직히 의문이다.
내가 겪은 언쟁이나, 지금 보여지는 일련의 소요는 분명 야구를 사랑하는 마음과는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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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급식 투표와 관련해서 자신의 거취를 표명하겠다던 오세훈 서울시장이 오늘 '무상급식 결과에 상관없이 내년 대선에 불출마 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한다. 무상급식 관련 주민투표에 어떻게든 힘을 실어보겠다는 안간힘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내게 오세훈 시장의 오늘 선언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식의 엉뚱함으로 느껴진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식의 '대선불출마'

이명박 대통령이 과거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출마의사를 밝혔을 때 그에게 서울시장직은 '대선을 위한 교두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이 재선의지를 밝혔을 때도 그 때와 다르지 않았고, 이러한 논란에 대해 오세훈 시장은 "임기를 다 채우는 서울시장이 되겠다."고 공식선언을 한 바가 있다. 오늘처럼.

그러니 오늘의 선언이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투표결과에 '시장직을 걸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두고 고민한다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뜬금없이 내년 대선불출마를 선언한 것은 곧 과거 임기를 다 채우겠다던 지난 선언이 거짓이며, 오세훈 시장 본인 스스로 서울시장을 대선을 위한 발판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다. 자신의 거취를 표명하는데 있어 대선을 언급했다면,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입장을 '서울시장'이라기 보다는 '차기 대권후보'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내년 대선에 불출마 하겠다는 선언 역시 내년이 되면, 어떻게 바뀌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우파의 국민선동은 참으로 지능적이기도 하다.

자신의 거취가 '차기 대권후보'였음을 천명한 오세훈 서울시장

2006년 오세훈 시장이 처음 서울시장에 출마할 당시, 그는 시정에 대한 아무런 지식과 견해 없이 소속정당이 입혀주는 옷을 그저 입고만 있던 마네킹에 불과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당시 여당의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의 대항마로서, 그는 스스로 만든 공약 하나 없이 모처에서 미리 만들어진 공약과 정책을 앵무새처럼 읊조리기에 바빴으니 말이다. 당시 신촌에서 있었던 박근혜 의원 테러사건이 난 다음, 유세장에서 "박근혜 의원님, 고맙습니다."를 외쳤을 정도라면 당시 그의 입장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런 과거에 대해 조금이라도 반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면, 오세훈 시장은 오늘처럼 국민을 우롱하려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오세훈 시장의 정치적 행보가 갖는 목적이 대통령이 되는 것인지, 대통령에 출마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그는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 하고 있는 것이며, 대통령에 출마하는게 목적이라면 스스로 허경영과 같은 4차원 엔터테이너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지 않은가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대통령과 대통령 후보 사이, 오세훈은 허경영이 부러웠나

그는 그냥 17대 국회의원 불출마를 선언하고, '아름다운 퇴장'이라 박수 받던 그 때까지가 좋았던 것 같다. 지금 오세훈 시장의 모습은 너무나도 안쓰러울만큼 가엾다. 일각에서 '5세훈이'라고 이야기 한다는데, 오늘 발표한 '조삼모사'의 형국을 보니, 다섯살도 그에게는 벅찬 나이임에 분명하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오늘의 선언으로 오세훈 서울시장은 '정치가'나 '지도자'이기보다는 스스로 '정치꾼'임을 인정한 셈이다.

그런 그는 현재 대한민국 수도, 서울특별시의 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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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무상급식의 시행여부를 두고 오세훈 서울시장이 발의한 주민투표가 오는 24일 실시된다고 한다. 서울시민에게는 1987년 제9차 개헌을 위해 실시된 국민투표 이후 24년만에 실시되는 선거 아닌 투표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주민투표를 두고 말들이 참 많다. 일단 이 주민투표는 정책의 시행여부를 묻는 진정한 주민투표이기보다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편 싸움의 양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교육감의 관리영역인 교육정책의 이슈를 가지고 주민투표를 발의하였으며, 이에 대해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은 이것이 관제, 기획투표라며 투표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모두들 시민을 위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들의 논의 어느 구석에도 시민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시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무상급식 주민투표

오세훈 서울시장은 무상급식은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이야기하며 주민투표까지 발의하였다. 이 주민투표의 주요 골자는, 초등학교 5,6학년을 대상으로 서울시의회가 책정한 무상급식예산 695억원을 집행할 것인지의 여부를 주민들에게 묻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교육관련 예산에 대해 시장이 왈가왈부 하는 것은 주제넘는 일임에 분명하다. 또 이것은 사실 주민들에게 의견을 묻기 민망한 질문이다. 일단 예산의 규모가 그렇다. 1천억원도 안되는 예산의 집행을 주민들에게 물을 정도의 겸손한 서울시장이었다면, 지난 5년간 7천억원 이상의 예산이 투입되었다는 한강 르네상스 사업에 대해서는 왜 시민에게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아무리 자신의 치적을 가시화 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고는 해도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 구축을 위해 시민을 우롱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지난 6.2 선거가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보여준 교훈을 그는 잊은 것 같다. 과정이 어쨌든 결과가 당선이니 그만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세훈 시장은 '강남 시장'이라는 오명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사실 그의 주민투표 발의도 이 강남3구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정말 무상급식이라는 제도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면, 서울시는 투표를 통해서 단순하게 '무상급식을 실시하하는데 동의하느냐, 반대하느냐'를 물어서는 안된다. 제품선호도를 조사하는 사설 리서치에서조차 이 제품을 좋아하느냐 마느냐의 단순한 질문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제품보다 가격이 얼마나 비싸더라도 이 제품을 선호하시겠느냐'라는 굉장히 실제적인 질문을 제시한다. 따라서, '무상급식을 실시하려면, 얼마만큼의 세금부담이 더하여질 것인데, 그 세금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것에 동의하느냐'라는 보다 깊이있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미 예산까지 책정된 정책의 집행여부를 시민에게 묻겠다는 것은 정책을 결정한 시민의 대표인 서울시의회를 무시하는 처사이며, 아울러 서울시민을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 구축에만 골몰하는 오세훈 서울시장

전면 무상급식을 찬성하는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역시 다르지 않다. 이번 투표는 오세훈 서울시장에 의해 기획된 투표이므로 시민들이 투표를 거부해 투표율을 유효투표율인 33.3% 미만으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단 이 주장은 시민이 가진 참정권을 엄청나게 훼손하는 일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번 주민투표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시민의 참정권을 보다 심하게 훼손했다 해서 투표거부를 주장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곽노현 교육감이 투표거부를 외치는 이유는 그 투표가 기획된 것이라기보다는 투표결과가 반대로 나오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지난 6.2 지방선거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소위 강남3구(서초, 강남, 송파)의 몰표가 우려되는 것이다. 투표결과에 대한 우려 때문에 투표거부를 선동하는 것이라면, 이 역시 자신을 지지해 준 서울시민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밖에는 이해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무상급식 실시문제를 두고 싸우면서 투표자체를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 과연 교육적인가 묻고 싶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그 법은 '고쳐야 할 법'이며, 고쳐지기 전이라면, 그 법은 '지켜져야 할 법'이기도 하다. 교육의 당사자인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문제로 비춰지는 어른들의 모습은 그 자체가 산 교육이다. 곽노현 교육감의 주장대로 이번 주민투표가 오세훈 서울시장에 의해 기획된 투표라고 치자. 그렇다면 이것은 시민의 의사를 왜곡하고 형식적 민주주의에 치중한 행동을 얼마나 정정당당하게 저항하였으며, 이후에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를 학생들이 실제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얼마나 생생한 시청각 자료인가.
 또한 곽노현 교육감은 자신의 임기중 학창시절을 보낸 학생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정당성 여부를 따지지도 않은 채 무작정 공권력에 저항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교육감이라면 교육행정을 잘 집행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교육적으로도 모범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 지금 현재의 모습을 학생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잠시라도 고민한다면, 투표거부와 같은 극단적 행동을 선동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기본적인 교육을 위한 사소한 규제조차도 '탄압'이라 이야기 하는 요즘의 교육현실에 대해 곽노현 교육감은 일말의 책임의식을 느껴야 한다.

공권력에 대한 무조건 저항을 정의(正義)라 가르치는 곽노현 교육감

정치와 행정은 국민의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것이 아무리 선정(善政)이라 하더라도, 독재일 뿐, 민주정치라 말할 수 없다. 이번 주민투표의 발의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모두 시민의 진정한 관심사에 대해서는 무심하다는 점에서 그 결과에 상관없이 교육적으로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참정권을 부여받은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투표에 빠져 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들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난 내게 주어진 바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투표결과는 너무도 절묘하고 세세하게 현재의 민심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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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북한의 공식 웹사이트인 '우리민족끼리'에 김정일, 김정은 부자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가 올라왔다 삭제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3대 세습 이후 북한의 저항이 굉장히 크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내부의 체제 비방이 있다고는 들었으나, 그것은 매우 음성적이라고 들었고, 이렇게 공개적으로 체제비방을 하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꽤 놀라운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공식 홈페이지에 이어 트위터에 체제비방 언급

방금 전, 북한의 공식 트위터 계정에도 김정일, 김정은 부자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의 멘션이 4개가 연이어 올라온 것을 발견했다. 홈페이지의 경우 불특정 다수가 접속하여 글을 쓸 수 있어, 체제비방의 주체가 누구인지 쉽게 알기 어렵지만, 트위터의 경우 1인 미디어이기 때문에 트위터를 통한 언급내용은 그 주체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한다는 점에서 이번 북한 트위터의 체제 비방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지금 북한에는 무슨 일이? - 내부 동요인가, 외부 해킹인가

이번 북한 트위터의 체제비방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그것은 일단 두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첫째, 북한 체제에 그만큼 위기가 도래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주체사상으로 강하게 무장된 북한이라 하더라도, 3대 세습까지 용인할 인내력은 없었던 모양이다. 최근 갑작스런 북한의 대화제의와 맞물려 북한의 움직임이 예전과 다르다는 인상을 받고는 있지만, 이번 트위터의 체제비방은 북한 체제붕괴의 위험성이 이전과는 다르게 증폭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둘째, 외부의 해킹 가능성이다. 트위터는 보안에 상당히 취약한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한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고 있는 사이트 중 하나이다. 또한 북한은 트위터를 통한 언급에 늘 관련 URL을 같이 명시(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접속할 수 없다)하여 놓았던데 비해, 이번 체제 비방 멘션은 관련 URL이 없다는 점이 이전과 다르다. 앞서 언급한대로 트위터가 1인 미디어임을 감안하면, 이러한 변화는 예사롭지 않다. 내부에서 목숨을 걸고 이같은 언급을 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외부 해커들의 공격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그 가능성 역시 매우 높다 하겠다.

내부 공격 가능성보다는 외부 해킹 가능성 높아

김일성 사후, 대부분의 북한 전문가는 북한체제가 3년 안에 붕괴될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그러나, 북한은 김일성의 유훈통치를 바탕으로 그 체제를 존속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한의 상황이 위기에 몰린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북한을 만만히 여길만한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북한에 대한 보다 신중하고 관심있는 관찰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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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김미화씨가 이른바 'KBS 블랙리스트'가 존재하여 자신이 방송출연을 저지당하고 있다는이야기를 들었다며, 블랙리스트의 존재여부를 알려달라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이후, 이것이 존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놓고 정말 말이 많다.

KBS는 즉각 이에 대해 그런 문건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였다고 주장하며 김미화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에 이르렀고, 뒤 이어 같은 의혹을 제기한 진중권, 유창선씨에 대해서도 고소를 함으로써 사태가 일파만파로 확대되는 분위기이다.

현 정권은 집권하면서부터 줄곧 '좌파척결'을 70년대 '멸공통일'처럼 입에 달고 산다. 지금 우리나라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모두 지난 과거 10년동안 좌파정권이 집권했기 때문이며, 이 좌파의 영향으로 우리나라는 근본을 잃고 헤메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느새 진보와 개혁은 좌파와 동일한 의미가 되었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이나 희망을 찾는 일조차도 이념의 잣대로 재단되고 있다. 그래서 방송인들의 방송출연도 그러한 맥락에서 결정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 좋다. 그렇게 이념의 잣대를 대고 싶다면, 대보자. 과거 10년의 정권이 좌파인지, 아니면 현 정권이 좌파인지. 난 가끔 좌파척결을 주장하는 현 정권이 우리가 정말 척결해야 할 좌파라는 생각을 그들의 행동을 통해 느끼는데 말이다.

과거 10년정권 VS. 현 정권, 과연 누가 좌파인가

현 정권의 수장인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임시절부터 자신의 치적을 가시화 하는데 상당히 공을 많이 들였으며, 지금도 그러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청계천 복원 사업, 서울광장 조성이 그 결과물이며, 이명박 대통령이 그토록 염원하는 한반도 대운하 사업은 4대강 사업으로 변형되어 또 다른 결과를 낳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뒤를 이어 서울시장에 오른 오세훈 시장 역시 광화문 광장 조성 등으로 전임자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모양새다. 심지어 '시프트'라 불리는 장기전세주택은 '오세훈 아파트'라는 별명까지 얻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앞서 이야기 한대로 재임 중 직무행위에 대한 결과를 가시화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결과는 인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겉으로 드러나 눈에 보이는 결과여야 한다. 내 생각에 이것은 물질을 제1차적·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유물론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 눈에 현 정권이 좌파로 보이는 까닭은 마르크스 주의를 파생시킨 유물론에 너무나 철저하게 근거한 그들의 사고와 행동 때문이다.

이번 'KBS 블랙리스트' 건도 마찬가지이다. 피해를 당했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고, 또 지속하여 의구심을 제기할 만한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시점에서 개인적으로 볼 때, 김미화씨가 주장하는 '블랙리스트'는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문서화 되어 있지 않은 것도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KBS는 성문화된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간단해서 좋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문건이 존재하지 않으니 블랙리스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들의 태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유물론 아닌 다른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 지식의 박약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아니라면 설명을 좀 해 보시라.

이런데도 현 정권은 마치 자신들이 진정한 우파인양, 과거 정권을 비롯하여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 견해나 사람을 만나면 그들을 좌파로 몰아세우는데 여념이 없다.

철저하게 유물론에 근거한 현 정권의 사고와 행동, 그들은 과연 우파인가

캐캐묵은 이념논쟁 따위는 하지 않겠다. 이념논쟁은 소련이 붕괴하면서 그 승부가 이미 갈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 정치에서 이념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고, 또 그 이념논쟁이 국민여론에 영향을 적잖이 미치고 있다는 점은 우리나라 정치나 국민의 의식수준의 현 주소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민족을 위해, 국민을 위해 바람직한 방향이라면 그게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나. 현 정권이 아직도 이념의 프레임에 얽매여 있는 이유는 민족과 국민을 위하는 일보다 집권자 개인과 기득권 층의 이익을 더 우선시하는 결과가 아니겠는가. 속이 곪아터지든 말든 겉보기에 그럴 듯 해보이는 일에만 여념이 없으면서 똑같은 모양새로 국민을 피폐하게 만드는 북한을 욕할 자격이 그들에게 과연 있는 것일까.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을 분별한 옛 조상들의 구분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사기업을 경영하면서 개인의 이익에만 골몰해왔던 한심한 장사치에게 나랏일을 맡긴 우리 국민의 업보라 여기기엔 너무나도 가혹하고 씁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 유물론에 쩔어있는 현 정권에게.
당신들은 정말 우파인지 아니면, 우파인 척 하는 보다 악랄한 좌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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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후배의 제보(?)를 받았다.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한 지역신문에 게재된 모교 교수님의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그 기사에 교수님의 개인정보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어 많이 놀랐다는 내용이었다.

듣자마자 바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인터뷰는 교수님의 프로필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 프로필의 백미는 맨 마지막, 교수님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였는데, 어쩌면 아파트 동, 호수까지 가리지 않고 고스란히 노출시켜 놓고 있었다.

해당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담당기자와 통화를 했다. 담당기자는 '원래 그 기사는 자사 회장님이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신 것을 자신이 정리한 것'이라고 했으며, 개인정보 공개에 대해 인터뷰 당사자인 교수님께서도 동의를 하셨다고 말했다.

기사와 상관없는 개인정보 공개, 본인만 동의하면 OK?

본인이 동의했다는데야 더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내가 궁금하게 여겼던 것은 교수님께서 과연 당신의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그렇게 통으로 기사에 싣는 것을 허락하셨을까 하는 점과, 아무리 본인이 동의했다 하더라도, 개인정보와 같은 중요정보를 기사내용과 관계없이 공중에 유포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하는 점이었다. 물론 인터뷰 기사 내용 중에 교수님은 뭔가 하나 정해지면 쉽게 바꾸지 않으시어 한 곳에 오래 살고 계시며, 전화번호도 예전 번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계신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꼭 아파트 동, 호수나 전화번호를 공개해야만 정보전달의 정확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다 알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본인이 동의하셨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해 지금까지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음을 그들은 자랑스레 강조했다. 그게 어디 신문사가 자랑스레 강조할 만한 일인가. 설사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문사에 생기는 일은 아닐텐데 말이다.

언론사의 개인정보관리, 자율규제 안하나 못하나

개인정보의 보호와 관련된 내용은 하나의 '윤리(倫理)'에 해당한다. 그것이 법에 의해 규제된다고 해서 해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난 분명히 그들에게 '윤리(倫理)'차원의 문제를 제시하였건만, 그들은 끝까지 내게 '법리(法理)'이상의 변명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오로지 법리(法理)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그들 앞에서 윤리(倫理)를 논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도 들만큼, 그들의 태도는 당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법리(法理)에만 타당하면 윤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이같은 태도는 언론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건전한 일반인으로서도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라는 생각을 갖는다. 이들은 그런 근본정신을 가지고 언론인으로 산다는 것, 그 자체를 수치로 여겨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보고 들어 얻은 모든 정보는 기어코 활자화 하여 드러내야 직성이 풀리는 언론 특유의 유아적 배설욕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정보관리와 같은 민감한 문제는 설사 본인의 동의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 공개에 보다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개인정보의 공개는 설사 그것이 본인의 동의를 받은 것이라 하더라도, 기사와 직접 관련한 사항으로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본인의 동의를 얻었다는 것은 그 정보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늘어놓는다는 것이 상당히 소모적이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따지고보면 오늘날 이 사회는 이렇게 지극히 상식적인 일조차 일일이 점검해야 할만큼 심각한 상황이라는 의미 아니겠나.

윤리(倫理)보다 법리(法理)가 우선인 사회

아마도 내가 했던 항의 이외에 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 한, 그 인터뷰 기사는 정정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시대의 눈과 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길 것이다. 이 어찌 가엾은 일이라 하지 않을까.

법만 지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형식적 준법정신은 사회의 건강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한, 나 한 사람이 준법의 목적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취하는 신중한 자세 하나가 우리 사회를 보다 건강하게 만든다는 사실도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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