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 서울의 대중교통정책이 새로운 모습을 선보인 지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많은 편리함과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현재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배우려고 몰려든다는 이 교통정책은 시행 4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시민들에게 익숙하지 못하다. 시민들이 제도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들은 제도의 편리함보다는 엄청난 요금인상에 대한 불만이 더 많아 보인다. 많은 예산과 노력을 기울여 탄생한 이 정책이 4년이 지난 지금도 익숙함과 거리가 먼 이유는 이 정책은 시민들의 교통이용행태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외국의 사례를 그대로 베껴 온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실제 현재 서울의 대중교통정책(특히 버스의 경우)은 여러 가지 면에서 프랑스의 대중교통정책과 매우 흡사하다. 특히 서울전체를 권역별로 나눠 고유번호를 지정한 후 기점과 종점 권역의 고유번호를 조합해 노선번호를 구성한 것은 프랑스의 제도와 똑같다. 프랑스에서는 이 제도를 바탕으로 행선지만 분명하면 어디서든 어떤 버스를 타야할 지 쉽게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의 경우 아직까지도 행선지를 바탕으로 어떤 버스를 타야할 지를 노선번호로 유추하는 시민은 거의 없다. 시민이 대중교통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세심한 고려 없이 외국의 우수정책사례를 고스란히 답습한 현 정책이 익숙함과 거리가 먼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익숙함과는 거리가 먼 서울 시내버스 타기

한편, 요즘 지하철역에 가보면 에스컬레이터 이용에 대한 계몽 포스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전광판에서도 에스컬레이터 이용에 대한 홍보 동영상이 수시로 방영되고 있다. 그러나 백화점 등 공공장소의 에스컬레이터는 줄곧 두 줄 타기를 해오던 시민들에게 서울시는 지하철 역사에 에스컬레이터 설치가 본격화되던 지난 2000년 이후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를 홍보해 오다가 이제 와서 에스컬레이터 한 줄타기를 하는 것은 마치 옳지 못한 부도덕한 행동인 것처럼 몰아세우니 당혹스럽기 그지 없다.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는 에스컬레이터의 한 쪽에만 과도하게 무게를 집중시키고, 또 에스컬레이터 내에서 걷거나 뛰게 되면 고장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에스컬레이터 두 줄타기를 강조하는 명분이다. 과연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는 시민들에게 피해가 가는 나쁜 습관일까.

영국 런던의 지하철 역에는 에스컬레이터마다 중간에 'Stand on the right'이라는 문구가 놓여있다. 에스컬레이터 두 줄 타기를 홍보하는 우리나라의 입장과 전혀 상반된 내용이어서 기억에 남았다. 또 왜 우리나라가 처음에는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를 강조했는지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한 줄 타기와 두 줄 타기 중 어느 것이 옳으냐 하는 것을 떠나 줄곧 에스컬레이터 두 줄 타기를 하던 시민들에게 한 줄 타기를 홍보했던 초기의 서울시의 모습은 외국의 사례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는 ‘빨리빨리’를 강조하는 한국의 문화와 무관하지 않았고, 느긋함과 분주함이 모두 함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민들에게 공감을 쉽게 얻어 시민들 사이에 빠르게 정착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에스컬레이터 두 줄 타기 홍보 역시 시민들의 에스컬레이터 이용행태를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은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시민의 이용행태를 고려하지 않은 정책은 규제의 틀에 얽혀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는 문화 병목현상의 주 원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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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좌왕하는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타기

위에 설명한 두 가지의 사례에서 시민의 행태에 대한 세심한 관찰부족 이외에 또 다른 하나의 문제를 보게 된다. 그것은 국가가 대중의 공공문화를 선도하는 상황에서 늘 국민의 ‘버르장머리’만을 고치려 한다는 점이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민주주의’의 구호를 이제 사회 모든 영역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늘 ‘너희가 행동을 이렇게 바꿔야 하며, 생각을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식의 계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시민들의 절대 협조를 요구해야 할 때도 있고, 그에 대해 시민들은 적극 협력해야 옳다. 그러나, 시민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문화를 도외시 하고 제시된 기준의 준수만을 종용하는 것은 민주사회의 원리에 역행하는 것이다.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로 인해 에스컬레이터의 고장이 잦아졌다면, 시민들의 이용행태를 바꾸는 것보다 시민들의 움직임에도 고장이 없는 보다 튼튼한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는 것이 훨씬 민주적이지는 않을지 생각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기업의 운영방식을 국가 운영에 접목시킨다고 해서 국가가 기업처럼 행세한다면, 시민을 위한 시정, 국민을 위한 국정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요즘은 기업도 제품을 생산함에 있어 소비자의 기호를 우선 고려하는 마당에 국민의 기호를 고려하지 않는 정책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국민을 선도해야 할 국정의 모습이 이렇듯 늘 경영의 행태를 뒤쫓고 있다는 사실이 한심하기 그지 없다.

국민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려고만 하는 정부

공공선택이론의 관점에서 정부규제이론을 정립한 조지 스티글러에 의하면, 정부규제의 수요자는 정부규제로부터 모종의 편익을 얻을 것으로 기대되는 비 규제산업 또는 피 규제직종으로 대표되는 이익집단이며, 이들에게 정부규제는 부의 분배를 위한 정치적 수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부가 국민을 규제하는 정책을 내놓을 때 그 주된 요인은 다른 것보다 그와 관련된 기업의 이해관계가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이다. 또 다른 경제학자 샘 펠츠만은 정부규제자가 추구하는 것은 자신을 지지하는 보다 많은 표(vote)라고 가정하고 있다(최병선, 1992). 에스컬레이터 두 줄 타기의 본 의도 역시 마찬가지로 시민의 안전에 있다기 보다 에스컬레이터 제조업체의 로비 또는 자신의 정치 지지층 확대를 위한 결과는 아니었는지, 서울시는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국민은 더 이상 국민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덤벼드는 정부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 정권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편, 국민들도 더 이상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정부를 가만 앉아 구경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Reference
최병선, '정부규제론', 법문사, 1992, pp.10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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