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무상급식의 시행여부를 두고 오세훈 서울시장이 발의한 주민투표가 오는 24일 실시된다고 한다. 서울시민에게는 1987년 제9차 개헌을 위해 실시된 국민투표 이후 24년만에 실시되는 선거 아닌 투표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주민투표를 두고 말들이 참 많다. 일단 이 주민투표는 정책의 시행여부를 묻는 진정한 주민투표이기보다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편 싸움의 양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교육감의 관리영역인 교육정책의 이슈를 가지고 주민투표를 발의하였으며, 이에 대해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은 이것이 관제, 기획투표라며 투표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모두들 시민을 위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들의 논의 어느 구석에도 시민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시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무상급식 주민투표

오세훈 서울시장은 무상급식은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이야기하며 주민투표까지 발의하였다. 이 주민투표의 주요 골자는, 초등학교 5,6학년을 대상으로 서울시의회가 책정한 무상급식예산 695억원을 집행할 것인지의 여부를 주민들에게 묻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교육관련 예산에 대해 시장이 왈가왈부 하는 것은 주제넘는 일임에 분명하다. 또 이것은 사실 주민들에게 의견을 묻기 민망한 질문이다. 일단 예산의 규모가 그렇다. 1천억원도 안되는 예산의 집행을 주민들에게 물을 정도의 겸손한 서울시장이었다면, 지난 5년간 7천억원 이상의 예산이 투입되었다는 한강 르네상스 사업에 대해서는 왜 시민에게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아무리 자신의 치적을 가시화 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고는 해도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 구축을 위해 시민을 우롱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지난 6.2 선거가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보여준 교훈을 그는 잊은 것 같다. 과정이 어쨌든 결과가 당선이니 그만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세훈 시장은 '강남 시장'이라는 오명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사실 그의 주민투표 발의도 이 강남3구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정말 무상급식이라는 제도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면, 서울시는 투표를 통해서 단순하게 '무상급식을 실시하하는데 동의하느냐, 반대하느냐'를 물어서는 안된다. 제품선호도를 조사하는 사설 리서치에서조차 이 제품을 좋아하느냐 마느냐의 단순한 질문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제품보다 가격이 얼마나 비싸더라도 이 제품을 선호하시겠느냐'라는 굉장히 실제적인 질문을 제시한다. 따라서, '무상급식을 실시하려면, 얼마만큼의 세금부담이 더하여질 것인데, 그 세금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것에 동의하느냐'라는 보다 깊이있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미 예산까지 책정된 정책의 집행여부를 시민에게 묻겠다는 것은 정책을 결정한 시민의 대표인 서울시의회를 무시하는 처사이며, 아울러 서울시민을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 구축에만 골몰하는 오세훈 서울시장

전면 무상급식을 찬성하는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역시 다르지 않다. 이번 투표는 오세훈 서울시장에 의해 기획된 투표이므로 시민들이 투표를 거부해 투표율을 유효투표율인 33.3% 미만으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단 이 주장은 시민이 가진 참정권을 엄청나게 훼손하는 일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번 주민투표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시민의 참정권을 보다 심하게 훼손했다 해서 투표거부를 주장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곽노현 교육감이 투표거부를 외치는 이유는 그 투표가 기획된 것이라기보다는 투표결과가 반대로 나오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지난 6.2 지방선거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소위 강남3구(서초, 강남, 송파)의 몰표가 우려되는 것이다. 투표결과에 대한 우려 때문에 투표거부를 선동하는 것이라면, 이 역시 자신을 지지해 준 서울시민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밖에는 이해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무상급식 실시문제를 두고 싸우면서 투표자체를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 과연 교육적인가 묻고 싶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그 법은 '고쳐야 할 법'이며, 고쳐지기 전이라면, 그 법은 '지켜져야 할 법'이기도 하다. 교육의 당사자인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문제로 비춰지는 어른들의 모습은 그 자체가 산 교육이다. 곽노현 교육감의 주장대로 이번 주민투표가 오세훈 서울시장에 의해 기획된 투표라고 치자. 그렇다면 이것은 시민의 의사를 왜곡하고 형식적 민주주의에 치중한 행동을 얼마나 정정당당하게 저항하였으며, 이후에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를 학생들이 실제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얼마나 생생한 시청각 자료인가.
 또한 곽노현 교육감은 자신의 임기중 학창시절을 보낸 학생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정당성 여부를 따지지도 않은 채 무작정 공권력에 저항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교육감이라면 교육행정을 잘 집행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교육적으로도 모범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 지금 현재의 모습을 학생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잠시라도 고민한다면, 투표거부와 같은 극단적 행동을 선동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기본적인 교육을 위한 사소한 규제조차도 '탄압'이라 이야기 하는 요즘의 교육현실에 대해 곽노현 교육감은 일말의 책임의식을 느껴야 한다.

공권력에 대한 무조건 저항을 정의(正義)라 가르치는 곽노현 교육감

정치와 행정은 국민의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것이 아무리 선정(善政)이라 하더라도, 독재일 뿐, 민주정치라 말할 수 없다. 이번 주민투표의 발의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모두 시민의 진정한 관심사에 대해서는 무심하다는 점에서 그 결과에 상관없이 교육적으로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참정권을 부여받은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투표에 빠져 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들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난 내게 주어진 바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투표결과는 너무도 절묘하고 세세하게 현재의 민심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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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서울의 대중교통정책이 새로운 모습을 선보인 지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많은 편리함과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현재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배우려고 몰려든다는 이 교통정책은 시행 4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시민들에게 익숙하지 못하다. 시민들이 제도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들은 제도의 편리함보다는 엄청난 요금인상에 대한 불만이 더 많아 보인다. 많은 예산과 노력을 기울여 탄생한 이 정책이 4년이 지난 지금도 익숙함과 거리가 먼 이유는 이 정책은 시민들의 교통이용행태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외국의 사례를 그대로 베껴 온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실제 현재 서울의 대중교통정책(특히 버스의 경우)은 여러 가지 면에서 프랑스의 대중교통정책과 매우 흡사하다. 특히 서울전체를 권역별로 나눠 고유번호를 지정한 후 기점과 종점 권역의 고유번호를 조합해 노선번호를 구성한 것은 프랑스의 제도와 똑같다. 프랑스에서는 이 제도를 바탕으로 행선지만 분명하면 어디서든 어떤 버스를 타야할 지 쉽게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의 경우 아직까지도 행선지를 바탕으로 어떤 버스를 타야할 지를 노선번호로 유추하는 시민은 거의 없다. 시민이 대중교통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세심한 고려 없이 외국의 우수정책사례를 고스란히 답습한 현 정책이 익숙함과 거리가 먼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익숙함과는 거리가 먼 서울 시내버스 타기

한편, 요즘 지하철역에 가보면 에스컬레이터 이용에 대한 계몽 포스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전광판에서도 에스컬레이터 이용에 대한 홍보 동영상이 수시로 방영되고 있다. 그러나 백화점 등 공공장소의 에스컬레이터는 줄곧 두 줄 타기를 해오던 시민들에게 서울시는 지하철 역사에 에스컬레이터 설치가 본격화되던 지난 2000년 이후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를 홍보해 오다가 이제 와서 에스컬레이터 한 줄타기를 하는 것은 마치 옳지 못한 부도덕한 행동인 것처럼 몰아세우니 당혹스럽기 그지 없다.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는 에스컬레이터의 한 쪽에만 과도하게 무게를 집중시키고, 또 에스컬레이터 내에서 걷거나 뛰게 되면 고장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에스컬레이터 두 줄타기를 강조하는 명분이다. 과연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는 시민들에게 피해가 가는 나쁜 습관일까.

영국 런던의 지하철 역에는 에스컬레이터마다 중간에 'Stand on the right'이라는 문구가 놓여있다. 에스컬레이터 두 줄 타기를 홍보하는 우리나라의 입장과 전혀 상반된 내용이어서 기억에 남았다. 또 왜 우리나라가 처음에는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를 강조했는지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한 줄 타기와 두 줄 타기 중 어느 것이 옳으냐 하는 것을 떠나 줄곧 에스컬레이터 두 줄 타기를 하던 시민들에게 한 줄 타기를 홍보했던 초기의 서울시의 모습은 외국의 사례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는 ‘빨리빨리’를 강조하는 한국의 문화와 무관하지 않았고, 느긋함과 분주함이 모두 함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민들에게 공감을 쉽게 얻어 시민들 사이에 빠르게 정착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에스컬레이터 두 줄 타기 홍보 역시 시민들의 에스컬레이터 이용행태를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은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시민의 이용행태를 고려하지 않은 정책은 규제의 틀에 얽혀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는 문화 병목현상의 주 원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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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좌왕하는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타기

위에 설명한 두 가지의 사례에서 시민의 행태에 대한 세심한 관찰부족 이외에 또 다른 하나의 문제를 보게 된다. 그것은 국가가 대중의 공공문화를 선도하는 상황에서 늘 국민의 ‘버르장머리’만을 고치려 한다는 점이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민주주의’의 구호를 이제 사회 모든 영역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늘 ‘너희가 행동을 이렇게 바꿔야 하며, 생각을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식의 계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시민들의 절대 협조를 요구해야 할 때도 있고, 그에 대해 시민들은 적극 협력해야 옳다. 그러나, 시민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문화를 도외시 하고 제시된 기준의 준수만을 종용하는 것은 민주사회의 원리에 역행하는 것이다.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로 인해 에스컬레이터의 고장이 잦아졌다면, 시민들의 이용행태를 바꾸는 것보다 시민들의 움직임에도 고장이 없는 보다 튼튼한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는 것이 훨씬 민주적이지는 않을지 생각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기업의 운영방식을 국가 운영에 접목시킨다고 해서 국가가 기업처럼 행세한다면, 시민을 위한 시정, 국민을 위한 국정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요즘은 기업도 제품을 생산함에 있어 소비자의 기호를 우선 고려하는 마당에 국민의 기호를 고려하지 않는 정책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국민을 선도해야 할 국정의 모습이 이렇듯 늘 경영의 행태를 뒤쫓고 있다는 사실이 한심하기 그지 없다.

국민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려고만 하는 정부

공공선택이론의 관점에서 정부규제이론을 정립한 조지 스티글러에 의하면, 정부규제의 수요자는 정부규제로부터 모종의 편익을 얻을 것으로 기대되는 비 규제산업 또는 피 규제직종으로 대표되는 이익집단이며, 이들에게 정부규제는 부의 분배를 위한 정치적 수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부가 국민을 규제하는 정책을 내놓을 때 그 주된 요인은 다른 것보다 그와 관련된 기업의 이해관계가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이다. 또 다른 경제학자 샘 펠츠만은 정부규제자가 추구하는 것은 자신을 지지하는 보다 많은 표(vote)라고 가정하고 있다(최병선, 1992). 에스컬레이터 두 줄 타기의 본 의도 역시 마찬가지로 시민의 안전에 있다기 보다 에스컬레이터 제조업체의 로비 또는 자신의 정치 지지층 확대를 위한 결과는 아니었는지, 서울시는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국민은 더 이상 국민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덤벼드는 정부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 정권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편, 국민들도 더 이상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정부를 가만 앉아 구경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Reference
최병선, '정부규제론', 법문사, 1992, pp.10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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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1호 숭례문이 잿더미로 변한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당국은 복원작업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 오세훈 시장이 '이번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겠다.'고 까지 하며 복원에 대한 청사진까지 제시하는 것을 보면, 마치 숭례문 복원을 위해 짜고 치는 한편의 고스톱 판을 보는 것만 같아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또 한편에서는 자발적으로 숭례문 복원을 위한 성금을 기부하고 있다. MBC 무한도전팀이 1억원을 기부하기로 결정했고,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측이 광복회에 2천만엔을 기부했는가하면, 서초구도 성금모금에 나서겠다고 한다. 또 연예인들의 기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것이 이명박 당선자의 말 때문이건 아니건, 국민의 뜻이 모아진다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만 이명박 당선자가 그렇게 나서서 할 말도 아니다. 그게 어디 성금인가, 세금이지). 하지만, 문제는 그 성금이 어떻게 관리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MBC 무한도전측은 1억원을 기부하기로 결정하고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2천만엔을 광복회에 기부했다. 서초구는 자체 모금창구를 만들 것 같다. 도대체 성금모금을 어디다 해야하는 건가. 광복회? 서초구?? 아니면 인수위???
상황이 이러한데도 숭례문 복원을 국민성금으로 이루자고 말한 이명박 당선자는 정작 그 성금을 어떻게 걷고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입을 열지 않고 있다. 뭐하자는 건가, 지금.

국민의 뜻을 관리할 방법은 만들어졌는가

과거 우리 국민은 국가로부터 수많은 성금납부를 강요받아왔다. 각종 수재의연금, 연말 불우이웃돕기성금, 방위비 납부, 독립기념관 건립, 평화의 댐 건축 등등 학교 다니면서 이런 잡부금 한 번 안 갖다낸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런 성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돌아갔느냐를 따져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수재를 당한 사람들은 보상도 받기 전에 이듬해 수재를 겪어야만 했고, 국민들은 자신들이 낸 성금이 그저 막연히 잘 쓰였겠거니 하고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독립기념관이 개관 열흘을 앞두고 작업자의 관리소홀로 화재가 발생해 개관을 1년 연기했을 때도, 국민들은 자신들의 성금으로 지어진 건물의 관리가 그토록 허술했던 것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우리 국민이 무신경 했거나, 순해서가 아니라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런 풍토 역시 당연시하게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참 세상 많이 좋아진 편이다.

성금에 사기당한 안 좋은 추억

이렇게 좋아진 세상에도 성금에 대한 의혹은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국가에서 모금하는 성금은 내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이 많다. 또 앞서 궁시렁 댄 바와 같이 정부가 앞장서서 국민성금모금 운운하는 것은 또 다른 과세방법이다. 국민성금모금, 아니 세금징수를 하려면 당당히 국회 동의를 얻어서 시행을 하든지, 아니면 먼저 성금을 내는 모범을 보여주든지... 17세기 시민혁명 때도 욕을 먹었던 짓거리를 아무 스스럼 없이 할 수 있는 그 무식한 용기를 지닌 대통령을, 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애꿎은 국민들만 죄인 만드는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민이 어디 있을까. 있다해도 제정신일까.

17세기에도 욕 먹었던 임의과세, 21세기에 가능할까

기업에서는 CEO는 지시만 내리고 실무는 밑에서 알아서 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는 기업처럼 어느 일부 주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5천만 모든 국민을 위한 것이다. 그 이익도, 손해도 모두를 위한 것이다. 과거에 기업하던 정신을 가지고 국가운영하는 것까지는 환영한다치자. 하지만 과거에 기업하던 정신머리로 국가운영하다가는 정말 크게 일 내고 만다. 국가는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닌, 모두를 위한 것임을 이명박 당선자는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정말 국민성금으로 숭례문을 복원하고 싶으면, 그에 대한 국민동의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부터 생각하고, 성금모금창구를 단일화하든지, 스스로 성금을 먼저 내든지, 실제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라. 국민은 성공한 대통령보다 국민과 함께하는 대통령을 더 원한다.

국가의 잘못을 국민성금으로 때우겠다는 정부와 국가에서 거두겠다는 성금의 용도를 신뢰하지 않는 국민. 어쩌면 불에 탄 숭례문보다 더 시급하게 복원해야 할 것은 오래 전부터 깨진 국가와 국민의 신뢰가 아닐런지. 이명박 당선자는 심각히 고민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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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정부조직개편내용을 발표했다. 18부 4처 18청 10위원회의 참여정부 현 조직을 13부 2처 17청으로 대폭 축소한 엄청난 규모이다. '단군이래 최대의 정부조직개편', '1969년 이후 최소의 정부조직축소'라는 자평이 인수위 관계자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이명박 당선자를 비롯한 차기정부가 우선과제로 추진하는 내용이 '작은 정부'의 실현이고보면, 오늘 발표된 정부조직개편은 그 목표에 상당히 접근했다는 평가를 내리기에 충분하다. 과연 이명박 정부는 '작은 정부'를 이루었을까?

단군이래 최대의 정부조직개편, 1969년 이후 최소규모

'큰 정부', '작은정부' 문제는 정부조직의 규모에만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국민에 대한 정부의 권한행사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 정부의 규모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가운데 하나이다. 근대 야경국가와 현대 복지국가를 구분하는 기준도 정부의 규모라기보다는 국민에 대한 정부의 역할규모였음을 생각할 때, 단군이래 최대의 정부조직개편이 그 규모의 축소만을 놓고 과연 작은 정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조금 신중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정부규모에 관한 논란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국민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정부의 역할이 커야 할 때도, 도 작아야 할 때도 있다. 이것은 정부의 국정지표가 '성장'이냐, '분배'냐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진다. 결국 이것은 상황논리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번 정부개편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 조직규모는 크기가 아닌 권한의 강도로 판단되어야

그렇다면, 차기 정부와 분명한 대척점에 서 있는 현 참여정부의 정부조직규모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차기 정부가 '성장'에 중점을 둔 반면, 현 정부는 '분배'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다. 따라서, 참여정부의 조직은 외형상 규모는 상당히 많이 늘어난 측면이 있다. 분야별로 많은 부분이 각기 그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분화되었다. 이는 정부가 국민생활에 실제관심을 두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단, 그 정부의 권한이 국민의 권리를 압박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 말이다.

참여정부는 조직의 분화와 함께 그 권한도 함께 분화되었다. '절대권한'이 존재하지 않는 조금은 낯선 정부, 그것이 지난 5년간 우리가 살아온 참여정부의 모습이다.
결국, 참여정부는 조직의 규모는 커졌으나, 정부역할이 세분화되면서 조직의 권한은 도리어 작아진 모양새를 갖추었다. 다시 말해, 참여정부의 모습은 정부의 규모와 권한이 반비례를 이룬, 이전 정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적잖이 생소한 모습이었다. 이것은 참여정부의 규모가 크고 방만해 각종규제가 많았다는 인수위의 평가에 내가 온전히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부에 한해 규제가 있었을 수 있으나, 전체 맥락을 놓고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정부규모와 권한의 반비례를 이룬 참여정부

차기 정부의 정부조직개편의 의미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융합을 통한 규모의 축소'라고 나름대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장관의 수도 40명에서 29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정부규모가 줄었다고 해서 정부역할이 줄었다고 할 수는 없다. 차기정부의 장관 29명은 참여정부에서 40명이 갖고 있던 권한을 가지게 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규모는 축소되었으나 권한은 더욱 강화된 것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정부의 규모는 국민에 대한 국가의 역할규모임을 생각할 때, 장관 한 명이 국민에 대해 갖는 권한은 실로 막강해진 차기 정부가 단지 규모의 축소만을 놓고 작은 정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이명박 당선자 특유의 또 다른 '조삼모사'는 아닐까.

규모는 작지만 강력한 권한, 과연 정부는 작아졌는가

또한, 인수위는 이번 정부조직개편으로 '정부규모는 1969년 이후 가장 최소'라고 발표했다. 대단한 일을 한 것이다. 1969년 이후 지난 39년간 사회 분화로 사회는 굉장히 복잡해지고 다양해졌다. 그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의 요구를 39년전의 정부규모로 모두 처리하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작은 정부가 지닐 권한은 상상하리 어려우리만치 엄청나다. 바람직한 거버넌스는 기대하기도 힘든 일이다. 국민과의 소통은 그림의 떡이다. 당,정,청 일체화를 통해 대권과 당권을 모두 장악한 제왕적 대통령을 꿈꾸려는 듯한 이명박 당선자의 행보를 생각할 때 차기 정부의 권한 강화를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이전보다 권한이 막강해진 정부를 두고 그 규모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작은 정부'라고 한다면, 그건 작은 정부가 뭔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걱정스럽기만 한 이명박의 제왕지상주의

앞서 설명한 대로 정부조직의 규모를 결정하는 바로미터는 정부의 국정지표가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것이다. 이명박 당선자는 '성장'을 선택했다. 과거에 성장을 지향했던 정부에서 보여준 그 무소불위의 힘을 우리는 아직 기억한다. 대학원 시절, 공기업 간부로 일하시던 한 분께서는 '한국 경제가 조금 더디 발전하는 문제가 생긴다 해도 절대 겪어서는 안되는 시절'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명박 당선자가 아직까지 '성장'을 고집한다는 것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 스스로 제왕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이것은 그를 지지한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그 앞에서 도덕성을 논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긴 하다). 우리의 성장은 이제 안정에 접어들었다. 따라서, 지금은 성장보다는 분배를 이야기 해야 할 때다. 안정에 접어든 성장을 계속 고집하는 것은 성장 이외의 다른 국정지표에 대해서는 펀더멘털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자인인 셈이다.

노무현이 싫어서 뽑았다는 이명박. 그러나 이제는 그가 노무현보다 더 싫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아직 취임하지도 않았는데, 걱정만 한 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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