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국제결혼을 통해 형성된 혼혈 가정('다문화 가정'이라 부르자는 요청이 있지만, 일단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에 대해서 보다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자는 취지의 캠페인 광고를 보았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한국에서 생활하는 가족인만큼 생김새가 다르고, 다른 문화를 경험해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차별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의 공익광고였다.

달갑지 않았다. 혼혈 가정을 '다문화 가정'이라고 바꾸어 부른다고 해서, 그들에게 이전보다 따뜻한 시선을 베푼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근본 해결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관계에 관한 문제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배려나 노력으로 개선이 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 광고는 보기에 따라 그들을 ‘혼혈 가정’이라 부르는 것은 그들에 대한 비하이고, ‘다문화 가정’이라 부르는 것이 존중이므로 반드시 그들을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그들을 배려하고 싶은 마음과 배려하고 싶지 않은 마음, 두 마음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어느 한 쪽의 편만 일방적으로 드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혼혈 가정을 다문화 가정이라 부르기 싫은 이유

내가 혼혈 가정에 대한 문화 배려의 문제에 다소 인색한 마음을 갖는 것은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혼혈 가정의 구성이 매우 인위적이라는 데 있다. 세계화 시대에 국적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결혼이 안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겠지만, 농촌 총각과 같이 우리나라에서 결혼 상대자를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 외국, 그것도 우리보다 경제형편이 낫지 못한 후진국의 여성들을 거의 사오다시피 해 이루어지는(어찌보면 합법적인 ‘인신매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국제결혼이 혼혈 가정의 문제를 사회문제로 등장시킨 대표적인 원인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물론 그렇지 않은 결혼이 더 많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따라서 혼혈 가정에 대한 인식 변화의 노력은 이같은 인위적인 결혼시도에 대한 미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는 정서상 특징으로 인해 아직 국제결혼이나 그로 인해 구성된 혼혈 가정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너그러운 편은 아니다. 이로 인해 많은 혼혈 가정이 불필요한 차별 속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문화의 특성상 그러한 차별을 잘못된 것이라고 치부하기엔 조금 억울한 면도 적지 않다. 단일민족의 특성은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된 특징이며, 민족의 대동단결의 기반으로 작용하는 바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갓 소수의 문화적응부족을 이유로 다수에게 민족문화의 대표상징을 배타적이라 평가절하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달갑지 않은 것은 단지 내가 가진 사고가 편협하기 때문인걸까.
농촌총각의 문제가 심각하고, 중요한 사회문제였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해결을 위해 국제 결혼을 국가가 권장하지도 않았던 상황에서 국제결혼으로 발생한 문화차이에 대한 부담을 국가에 요청하고 국가는 이것을 당사자와 아무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의 정서상 특징이 분명 잘못되지 않은 것이라면, 그러한 스스로의 결정이 가져올 문제를 감내할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 단지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일단 저질러놓고 국가에 사후 대책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당연한 국민의 자세일까. 혼혈 가정의 형성을 국가가 강제한 사항이 아닌 상황에서 그로 인한 사회 문제 해결을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은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무책임한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게 어디 농촌총각만의 문제이랴. 이것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동일시하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문제는 아닐는지. 자기가 다급하다고 일단 ‘저질러놓고’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좋은게 좋은 거 아니겠냐’는 식으로 자신의 경솔함을 무마시키는 것은 사회 전반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혼혈 가정의 문화 배려가 달갑지 않은 나, 잘못된 걸까?

혼혈 가정의 문화 배려 문제는 무엇보다 당사자의 노력이 우선 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떳떳하고 당당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배려를 기대하기 이전에 먼저 스스로 노력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방송인 이다도시의 경우를 보자. 지금 그가 이룬 가정(요즘 꽤 힘들다고 들었다.)이 혼혈 가정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대하기란 쉽지 않다. 그의 아들 유진군 역시 외모가 한국형은 아니지만, 그를 한국인으로 인식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이같은 결과는 사회의 배려보다 당사자의 노력이 더 큰 역할을 했다. 물론, 배려보다 당사자의 노력이 몇 배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한국사람으로 살기를 선택했다면, 타국 사람에 대한 배려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한국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사람 사는게 다 똑같지’라는 단지 막연한 관념으로 타국에서 결혼생활을 하려고 생각했다면, 그건 너무 결혼생활을 쉽게 생각한 결과이며, 그에 대한 책임도 분명 감수해야 마땅하다.

혼혈 가정의 문화 배려는 당사자의 노력에서부터

우리나라는 식민통치의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혹시 무작정 다른 사람에게 배려하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단지 그들이 우리의 이웃이 되었다 해서 내 민족의 정통성을 훼손하면서까지 그들을 배려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왜 우리 민족은 외국에 이민을 가면 그네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강요받으면서, 우리나라에 온 혼혈 가정에 대한 배려까지 강요받아야 하는가. 그게 미덕일까. 그것은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한국인으로 살고자 하는 외국인들에게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한국인으로 살고자 하는 그들에게 보이는 관심이 그들에게 지나친 간섭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자생력을 잃고 의존하게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가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다가가는 것이 때론 그들에 대한 그리고, 우리에 대한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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