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급식 투표와 관련해서 자신의 거취를 표명하겠다던 오세훈 서울시장이 오늘 '무상급식 결과에 상관없이 내년 대선에 불출마 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한다. 무상급식 관련 주민투표에 어떻게든 힘을 실어보겠다는 안간힘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내게 오세훈 시장의 오늘 선언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식의 엉뚱함으로 느껴진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식의 '대선불출마'

이명박 대통령이 과거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출마의사를 밝혔을 때 그에게 서울시장직은 '대선을 위한 교두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이 재선의지를 밝혔을 때도 그 때와 다르지 않았고, 이러한 논란에 대해 오세훈 시장은 "임기를 다 채우는 서울시장이 되겠다."고 공식선언을 한 바가 있다. 오늘처럼.

그러니 오늘의 선언이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투표결과에 '시장직을 걸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두고 고민한다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뜬금없이 내년 대선불출마를 선언한 것은 곧 과거 임기를 다 채우겠다던 지난 선언이 거짓이며, 오세훈 시장 본인 스스로 서울시장을 대선을 위한 발판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다. 자신의 거취를 표명하는데 있어 대선을 언급했다면,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입장을 '서울시장'이라기 보다는 '차기 대권후보'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내년 대선에 불출마 하겠다는 선언 역시 내년이 되면, 어떻게 바뀌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우파의 국민선동은 참으로 지능적이기도 하다.

자신의 거취가 '차기 대권후보'였음을 천명한 오세훈 서울시장

2006년 오세훈 시장이 처음 서울시장에 출마할 당시, 그는 시정에 대한 아무런 지식과 견해 없이 소속정당이 입혀주는 옷을 그저 입고만 있던 마네킹에 불과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당시 여당의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의 대항마로서, 그는 스스로 만든 공약 하나 없이 모처에서 미리 만들어진 공약과 정책을 앵무새처럼 읊조리기에 바빴으니 말이다. 당시 신촌에서 있었던 박근혜 의원 테러사건이 난 다음, 유세장에서 "박근혜 의원님, 고맙습니다."를 외쳤을 정도라면 당시 그의 입장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런 과거에 대해 조금이라도 반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면, 오세훈 시장은 오늘처럼 국민을 우롱하려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오세훈 시장의 정치적 행보가 갖는 목적이 대통령이 되는 것인지, 대통령에 출마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그는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 하고 있는 것이며, 대통령에 출마하는게 목적이라면 스스로 허경영과 같은 4차원 엔터테이너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지 않은가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대통령과 대통령 후보 사이, 오세훈은 허경영이 부러웠나

그는 그냥 17대 국회의원 불출마를 선언하고, '아름다운 퇴장'이라 박수 받던 그 때까지가 좋았던 것 같다. 지금 오세훈 시장의 모습은 너무나도 안쓰러울만큼 가엾다. 일각에서 '5세훈이'라고 이야기 한다는데, 오늘 발표한 '조삼모사'의 형국을 보니, 다섯살도 그에게는 벅찬 나이임에 분명하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오늘의 선언으로 오세훈 서울시장은 '정치가'나 '지도자'이기보다는 스스로 '정치꾼'임을 인정한 셈이다.

그런 그는 현재 대한민국 수도, 서울특별시의 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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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북한의 공식 웹사이트인 '우리민족끼리'에 김정일, 김정은 부자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가 올라왔다 삭제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3대 세습 이후 북한의 저항이 굉장히 크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내부의 체제 비방이 있다고는 들었으나, 그것은 매우 음성적이라고 들었고, 이렇게 공개적으로 체제비방을 하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꽤 놀라운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공식 홈페이지에 이어 트위터에 체제비방 언급

방금 전, 북한의 공식 트위터 계정에도 김정일, 김정은 부자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의 멘션이 4개가 연이어 올라온 것을 발견했다. 홈페이지의 경우 불특정 다수가 접속하여 글을 쓸 수 있어, 체제비방의 주체가 누구인지 쉽게 알기 어렵지만, 트위터의 경우 1인 미디어이기 때문에 트위터를 통한 언급내용은 그 주체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한다는 점에서 이번 북한 트위터의 체제 비방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지금 북한에는 무슨 일이? - 내부 동요인가, 외부 해킹인가

이번 북한 트위터의 체제비방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그것은 일단 두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첫째, 북한 체제에 그만큼 위기가 도래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주체사상으로 강하게 무장된 북한이라 하더라도, 3대 세습까지 용인할 인내력은 없었던 모양이다. 최근 갑작스런 북한의 대화제의와 맞물려 북한의 움직임이 예전과 다르다는 인상을 받고는 있지만, 이번 트위터의 체제비방은 북한 체제붕괴의 위험성이 이전과는 다르게 증폭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둘째, 외부의 해킹 가능성이다. 트위터는 보안에 상당히 취약한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한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고 있는 사이트 중 하나이다. 또한 북한은 트위터를 통한 언급에 늘 관련 URL을 같이 명시(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접속할 수 없다)하여 놓았던데 비해, 이번 체제 비방 멘션은 관련 URL이 없다는 점이 이전과 다르다. 앞서 언급한대로 트위터가 1인 미디어임을 감안하면, 이러한 변화는 예사롭지 않다. 내부에서 목숨을 걸고 이같은 언급을 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외부 해커들의 공격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그 가능성 역시 매우 높다 하겠다.

내부 공격 가능성보다는 외부 해킹 가능성 높아

김일성 사후, 대부분의 북한 전문가는 북한체제가 3년 안에 붕괴될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그러나, 북한은 김일성의 유훈통치를 바탕으로 그 체제를 존속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한의 상황이 위기에 몰린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북한을 만만히 여길만한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북한에 대한 보다 신중하고 관심있는 관찰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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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김미화씨가 이른바 'KBS 블랙리스트'가 존재하여 자신이 방송출연을 저지당하고 있다는이야기를 들었다며, 블랙리스트의 존재여부를 알려달라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이후, 이것이 존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놓고 정말 말이 많다.

KBS는 즉각 이에 대해 그런 문건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였다고 주장하며 김미화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에 이르렀고, 뒤 이어 같은 의혹을 제기한 진중권, 유창선씨에 대해서도 고소를 함으로써 사태가 일파만파로 확대되는 분위기이다.

현 정권은 집권하면서부터 줄곧 '좌파척결'을 70년대 '멸공통일'처럼 입에 달고 산다. 지금 우리나라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모두 지난 과거 10년동안 좌파정권이 집권했기 때문이며, 이 좌파의 영향으로 우리나라는 근본을 잃고 헤메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느새 진보와 개혁은 좌파와 동일한 의미가 되었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이나 희망을 찾는 일조차도 이념의 잣대로 재단되고 있다. 그래서 방송인들의 방송출연도 그러한 맥락에서 결정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 좋다. 그렇게 이념의 잣대를 대고 싶다면, 대보자. 과거 10년의 정권이 좌파인지, 아니면 현 정권이 좌파인지. 난 가끔 좌파척결을 주장하는 현 정권이 우리가 정말 척결해야 할 좌파라는 생각을 그들의 행동을 통해 느끼는데 말이다.

과거 10년정권 VS. 현 정권, 과연 누가 좌파인가

현 정권의 수장인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임시절부터 자신의 치적을 가시화 하는데 상당히 공을 많이 들였으며, 지금도 그러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청계천 복원 사업, 서울광장 조성이 그 결과물이며, 이명박 대통령이 그토록 염원하는 한반도 대운하 사업은 4대강 사업으로 변형되어 또 다른 결과를 낳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뒤를 이어 서울시장에 오른 오세훈 시장 역시 광화문 광장 조성 등으로 전임자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모양새다. 심지어 '시프트'라 불리는 장기전세주택은 '오세훈 아파트'라는 별명까지 얻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앞서 이야기 한대로 재임 중 직무행위에 대한 결과를 가시화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결과는 인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겉으로 드러나 눈에 보이는 결과여야 한다. 내 생각에 이것은 물질을 제1차적·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유물론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 눈에 현 정권이 좌파로 보이는 까닭은 마르크스 주의를 파생시킨 유물론에 너무나 철저하게 근거한 그들의 사고와 행동 때문이다.

이번 'KBS 블랙리스트' 건도 마찬가지이다. 피해를 당했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고, 또 지속하여 의구심을 제기할 만한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시점에서 개인적으로 볼 때, 김미화씨가 주장하는 '블랙리스트'는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문서화 되어 있지 않은 것도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KBS는 성문화된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간단해서 좋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문건이 존재하지 않으니 블랙리스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들의 태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유물론 아닌 다른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 지식의 박약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아니라면 설명을 좀 해 보시라.

이런데도 현 정권은 마치 자신들이 진정한 우파인양, 과거 정권을 비롯하여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 견해나 사람을 만나면 그들을 좌파로 몰아세우는데 여념이 없다.

철저하게 유물론에 근거한 현 정권의 사고와 행동, 그들은 과연 우파인가

캐캐묵은 이념논쟁 따위는 하지 않겠다. 이념논쟁은 소련이 붕괴하면서 그 승부가 이미 갈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 정치에서 이념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고, 또 그 이념논쟁이 국민여론에 영향을 적잖이 미치고 있다는 점은 우리나라 정치나 국민의 의식수준의 현 주소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민족을 위해, 국민을 위해 바람직한 방향이라면 그게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나. 현 정권이 아직도 이념의 프레임에 얽매여 있는 이유는 민족과 국민을 위하는 일보다 집권자 개인과 기득권 층의 이익을 더 우선시하는 결과가 아니겠는가. 속이 곪아터지든 말든 겉보기에 그럴 듯 해보이는 일에만 여념이 없으면서 똑같은 모양새로 국민을 피폐하게 만드는 북한을 욕할 자격이 그들에게 과연 있는 것일까.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을 분별한 옛 조상들의 구분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사기업을 경영하면서 개인의 이익에만 골몰해왔던 한심한 장사치에게 나랏일을 맡긴 우리 국민의 업보라 여기기엔 너무나도 가혹하고 씁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 유물론에 쩔어있는 현 정권에게.
당신들은 정말 우파인지 아니면, 우파인 척 하는 보다 악랄한 좌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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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 속에 6.2 지방선거가 막을 내렸다. 결과를 놓고 보면, 여당인 한나라당은 참패하였고,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엄청난 약진을 하면서 2004년 총선이후 최대의 선거결과를 이루어냈다.
특히 서울시장 선거결과는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개표 중반부터 꾸준히 선두를 유지하던 민주당 한명숙 후보가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에게 막판 역전을 허용한 것이다. 0.7% 포인트의 너무나도 근소한 패배. 오세훈 후보도 시인했듯이 이것은 오세훈 후보가 '사실상 진' 게임이다.
오세훈 후보가 '사실상 졌다'고 시인했으면, 한명숙 후보는 '사실상 이긴' 상황인데 나는 한명숙 후보는 사실상 이겼더라도, 한명숙 후보와 함께한 선거캠프 관계자들은 오세훈 후보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진' 것이라 평가하고 싶다. 개표상황 내내 그들이 보여준 실망스러움은 한명숙 후보의 선전을 희석하고 말았다. 무엇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을까?

한명숙 후보의 선전을 희석시킨 한명숙 후보캠프

TV와  선관위 홈페이지 그리고 한명숙 후보 홈페이지를 번갈아 살피면서 개표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한명숙 후보 홈페이지의 자체 TV생중계에서 밝힌 선관위 공식집계와는 달랐던 그들만의 개표현황이었다.
 
그들만의 집계현황은 개표율은 선관위의 공식집계보다 약 3%정도 앞선 것이었고, 2위와의 표차도 선관위의 공식집계보다 무려 25,000표 가량 더 차이가 나는 수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번 선거에서 서울시의 전체 유권자 약 827만명 가운데 투표자 수가 약 440만명이었음을 감안할 때 3%라면 대략 13000표. 그 3%가 모두 한명숙 후보의 표라 해도 이것은 수치가 안 맞는 것이었지만, 방송을 담당하는 VJ들은 개표현장에 파견된 요원들의 제보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서 그 말은 사실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이해찬 전 총리 역시 선거캠프에서, 그리고 서울광장에서 두 차례씩이나 이 사실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면서 '이 추세라면 아침무렵에는 약 15만표 차이로 당선이 확정될 것'이라고 까지 말했다.

이해찬 전 총리라면, 1988년 13대 총선 때부터 선거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겪었을 사람 아니던가. 그가 내 놓은 분석은 그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 생각이 들었지만, 수치상 앞뒤가 안 맞는 계산에 대해 어느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또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한 지지자들은 서울 광장에 모여 15%남짓 개표된 결과만으로 이미 승리를 확신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한명숙 후보는 짐짓 신중하고자 했으나, 캠프에 있던 다른 지지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지나치게 감정적이었고, 성급했다.

나는 당시 한명숙 후보 캠프에서 내놓았던 그들만의 개표현황이 억지로 조작된 사실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개표 내내 한명숙 후보가 8천표 이상 앞선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들만의 개표현황이 상당히 왜곡되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던 왜곡된 그들만의 개표결과

과거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국민의 외면을 받았던 이유는 그들의 목적과 이념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실패한 정부로 인식되고 있는 이유는 차가운 이성을 외면한 채 너무나도 뜨거운 가슴만으로 그들의 목적과 이념을 떠받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수구세력의 눈에 과거 냉전시대에 죽창을 들고 덤비던 '좌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억울하되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현재 민주세력의 상대는 매우 영리하고 교활하다. 잔꾀에 능한 그들과 맞서 싸우는 일은 한두번에 끝날 일이 아니다. 따라서, 장기적인 안목 속에 전략적이고 치밀해야 한다. 그들이 억지를 부리더라도 우리는 냉정해야 한다. 그래도 이길까 말까한 승부다. 그런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왜곡된 결과물을 마치 사실인양 공개하는 것은 MB정권의 독재만큼이나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개표결과의 왜곡에 대해 책임을 묻지는 않겠다. 그 이유는 이미 지나간 일이기도 하고, 이번 선거가 감정적으로 그럴만한 게임이라는 충분한 개연성이 있었으며, 그런 사소한(?) 일에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아웅다웅하는 모양새가 그리 좋아보일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하자. 그 모습이 그리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열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그릇된 행동은 민주세력을 시샘하는 많은 적들에게 또 다른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은 냉정함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행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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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전병헌 의원이 현행 투표연령을 19세에서 18세로 낮추는 것을 내용으로 한 공직자선거법 개정법률안이 조속히 통과되기를 원한다고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오늘 밝혔다. 이것은 민주당이 지난 3월부터 당론으로 지정하고 추진해 온 공직자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전병헌 의원은 "되도록이면 이번 6월의 지방선거부터 고등학교 3학년에 준하는 18세 청소년부터 교육감 및 지자체장을 선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나는 원론적으로 민주당과 전병헌 의원의 이같은 견해에 동의한다. 보다 많은 국민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측면에서 선거연령의 확대는 가능한 한 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거 연령의 확대 이전에 지금 이 결정이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에 대해 신중히 고민한 결과였는가에 대해서는 한 번 생각해 봄 직 하다.

선거연령의 확대 이전에 생각해야 할 것

개정안대로 만18세 이상의 국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고 치자. 10대 연령층의 유권자 가운데서 선거에 참여하고자 하는 국민은 과연 얼마나 될까. 선거에 대한 수요가 많고, 투표참여에 대한 요청이 빗발치는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이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레 이 부분부터 생각을 해봐야 할 것이다. 과연 선거연령 확대는 대상연령자들이 원하는 바인가. 그게 아니라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무작정 선거 연령만을 확대하여 놓고 정작 참여를 독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투표율 저하로 인한 국민의 정치 무관심 증대에만 기여할 뿐 실제 10대의 정치의사 반영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기성세대가 짐작하고 있는만큼 현재 우리나라 10대의 정치의사결정능력이 유효한 수준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물론, 명민하고 영리한 우리의 10대들은 그 생각도 참신하고 독특하다. 이들의 창의능력을 사장시키는 것은 국가적인 손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10대들은 바람직한 사회와 바람직한 미래에 대해 실제적으로 고민할만한 기본 바탕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입시현장에서 10대들을 수년간 지켜봐 온 내 견해이다.

이것은 10대들의 교육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은 기성세대의 책임이 크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제일 먼저 손을 대는 것이 입시제도이고, 그 입시제도에 10대들은 아무 저항없이 끌려다니기만 했다. 제대로 하는 것보다 잘 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지다보니,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편의주의가 교육현장에 만연하게 된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 바람직한 기본 바탕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우리의 10대에게 이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할 자격을 준다는 것은 갓난 아이의 손에 칼을 쥐어주는 것과 같은 위험천만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갓난아이의 손에 칼부터 쥐어주는 무모함은 피해야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선거연령의 확대는 가능한 최대로 이루어져야 함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선거연령의 확대로 인해 발생하게 될 여러가지 문제점에 대해 현실적으로 고민한 흔적을 보여주어야 마땅하다. 아무런 근거없이 그저 10대들에게 선거권을 주자고 외쳐대기 때문에, 그동안 민주세력의 정책이 '포퓰리즘'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거연령을 확대하여 10대에게도 선거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이 이 사회의 현상에 대해 바르게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기본바탕을 심어줄만한 제대로 된 교육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입시에서의 승리를 성공으로 간주하는 현행 교육제도에서 이러한 시각을 갖춘 건전한 젊은이를 양산해 내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 그러자면, 요즘같이 복잡한 세상, 복잡한만큼 전략적이어야 한다. 전병헌 의원을 비롯한 민주당의 신중한 자세를 다시 한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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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이 끝났음에도 국민들의 추모열기는 계속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뜻을 이어나가겠다는 민주 시민의 열기도 여느 때 못지 않게 뜨거워 보이고,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이같은 뜨거운 열기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은 뜨거운 열기와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전까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이같은 국민의 열기는 모두 세 차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무렵이 그 첫번째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던 시점이 두 번째요,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 무렵이 그 세 번째다. 당시 국민의 성원으로 봤을 때는 국민들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성원은 영원하리라고 믿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 역시 탄핵 때부터 꾸준히 이어져 오던 말이다. 다시 국민들은 네 번째 똑같은 약속을 거듭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국민들에게 이미 세 차례 배신을 당한 셈이다.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민주당의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는 상상을 초월할만큼 극과 극을 달린다. 참여정부의 지지율이 낮을 때는 참여정부세력에 대한 비난과 차별에 한나라당 못지 않은 적극성을 보였던 민주당이 이제와서는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민주당은 참여정부 시절 열린우리당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조차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의 전신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노무현을 거듭 배신해 온 국민과 정당, 과연 믿을만 한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국민 전체의 추모열기, 서울광장을 가득 메웠던 저 열기는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2010년 지방선거 때까지만이라도 유지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같은 나의 기대가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의 추모열기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며, 잠시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2010년 지방선거 때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나의 기대는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다.
우리 국민들이란, 평생을 함께할 것처럼 열광하고 성원해 놓고도 보수 언론과 수구 세력의 말 한마디에 속절없이 무너져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일삼던 지조없는 사람들 아니었나.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 역시 '참여정부의 성과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라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참여정부가 옳았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참여정부가 옳았다고 평가를 내리는 것이 민주당이 잘못했다는 반성과 사죄로 이어지지 않을 것임은 또 역시 자명하다.
현재 보여지고 있는 민주당의 반응은 실상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낫게 평가하는 현 시국을 교묘히 이용하려고 하는 박쥐근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친노 386세력의 척결과, 참여정부와의 차별화를 소리높여 외치던 이들이었다.

본은 바꾸려 하지 않는 국민과 민주당, 모두 각성해야

노무현 대통령의 뜻을 이어가겠다고 약속했다면, 그 뜻을 따르겠다고 앵무새처럼 떠들기만 할 일이 아니다. 그의 뜻에 따라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해야 할 지 실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또 참여정부에 대해 재평가 하겠다면, 지금 현재의 모습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근본부터 바꾸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 참여정부가 옳았다면, 참여정부의 정신대로 정치하겠다는 약속이 있어야 한다. 지역정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국정당의 기치를 내세웠던 열린우리당의 창당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정당차원의 선언이 있어야 한다.

그런 실제 노력이 있지 않는 한,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을 죽인 현 정부나 그들을 추종하는 한나라당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이들이며, 노무현 대통령을 부엉이 바위에서 밀어제낀 포괄적 살인의 공범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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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지 이틀 째, 그를 조문하기 위해 봉하마을을 방문한 조문객 수가 이 시각 현재 6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빈소가 마련된 봉하마을 뿐만 아니라, 서울 덕수궁을 비롯한 곳곳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분향소를 차려놓고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다시는 어려움과 괴로움에 고민하지 않아도 된 대통령이지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늘 당당하게 정면돌파를 택했던 대통령이었기에, 그의 죽음이(투신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지도 모르겠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인 가운데 아마도 최초로 자발적으로 결성된 팬클럽을 가지고 있었던 정치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노사모에 대한 애정 역시 노사모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준 성원만큼이나 각별했음을 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나를 포함하여 노사모를 비롯한 모든 노무현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고자 한다. "우리는 정말 노무현을 사랑했을까요?"

우리는 정말 노무현을 사랑했을까?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정치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이 일반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그를 통하여 국민이 기대하는 바를 가장 잘 투영할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의 뜻을 잘 알아주는 것, 그리고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애 쓰는 것, 그것이 타인의 사랑을 얻기 위한 가장 정확한 비결이 아닐까. 정치인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잘 알기 위해 노력했고,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땀 흘리며 애쓴 장본인이다.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노사모와 나를 포함한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했나?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를 통한 시민주권시대가 열리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정부의 이름도 '참여정부'라 지었다. 그리고 시민주권시대의 중심에 '노사모'가 있어주기를 바랬다. 여기에서 '노사모'는 단순히 한 정치인의 팬클럽이 아닌 시민 주체의 한 전형을 의미했다. 정당이나 시민 단체가 하지 못하는 시민 참여의 한 구석을 밝히는 시민사회조직으로 발전해 나가주기를 대통령은 원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참여를 통한 시민주권시대

그러나(적어도 내가 보기에), 노사모는 정치인 팬클럽의 한계를 떨쳐내지 못했다. 그것은 노무현 대통령 집권 당시는 물론 서거 이후 현재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신흥 종교 집단과 같은 공포심이 우리를 감싼다. '큰 인물이 될 사람을 미리 알아본 사람들'이라는 교만함, 집권자의 순수 추종 세력이라는 모종의 자만심. 아마도 노사모를 대표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아닐까.

결국,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제외하고 노사모를 생각할 수 없는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동영을 향해 '배신자'라 외치고, 한나라당 출신 의원들의 조문을 저지하며, 조중동 언론의 취재를 거부하는 노사모 여러분께 묻는다.
여러분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 생각하는가.
노사모가 정치인의 팬클럽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않는 이상,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의 행동은 그 어떠한 것도 정당성을 얻기 힘들어진다. 단순히 '한 사람의 추종자'가 벌이는 저항의 일부로 폄하될 뿐이다.

정치인 팬클럽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노사모

국민이 원하는 바를 노무현 대통령이 읽어냈듯이,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면, 그가 나라를 위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신중하게 고민할 줄 알아야 했다. 노무현이라는 한 인물에 집중하기보다 그가 가지고 있는 가치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었고,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해 손을 맞잡아야 할 책임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궁지에 몰린 극한 상황에서 인간 노무현은 홀로 외롭게 그런 극단의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혹시 가치의 정당성에는 동의했을 지라도, 그 가치의 실현은 철저히 노무현 한 사람에게 위임하기만 하지 않았는지.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그를 진정 사랑한 것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라는 이 믿기 힘든 비극적 상황은, 우리에게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요구한다.

아울러,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에 대한 비난이 노무현 대통령을 위한 길이라는 그릇된 생각은 버리자. 노무현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그를 사랑하는 우리의 그릇도 커져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 자체보다 그 사람이 지닌 가치에 더욱 집중해야

우리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사랑에 쉼표를 찍고 있는 동안,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떠나고 우리는 남았다.
남겨진 자들에게는 나름대로 남겨진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에 대한 사랑에 찍었던 쉼표를 뛰어넘어 그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보여야 할 때다. 노무현 대통령의 가시는 길이 조금이나만 편하기를 원한다면, 그가 추구했던 가치, 그가 지녔던 이상은 이제 우리의 몫이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빈약한 민주주의 역사 탓에 시민참여만큼은 그 기반이 상당히 취약하기만 하다. 그 시민참여의 기틀을 토착화 함으로써 모든 국민의 국정참여를 현실화 하는 일,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에게 남겨준 작지만 매우 큰 숙제이다.

그 숙제가 완성되는 날, 우리가 그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 그 날에 노무현 대통령은 하늘에서 비로소 웃음지으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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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한 번 가는 인생이기에, 오늘 같은 날이 오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너무도 빨리 다가 온 오늘의 사건은 그 당혹함을 헤아릴 틈 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죽음 이전에 그가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더욱 더 안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추구했던 지역주의 청산, 시민주권사회를 완성하는 것은 이제 남아있는 우리들의 숙제가 되었습니다. 나 스스로부터 이에 대한 실천 방안을 차분히 고민해야겠습니다.

한편으로, 늘 '좌파', '빨갱이'라는 매도를 통해 참여정부의 잔재를 소멸하고자 애써 온 현 정부의 시름이 조금은 덜어졌을리라는 생각에 위로를 삼아야 할까요.

할 말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말부터 먼저 해야 할 지 모르겠군요.
일단 오늘은 한 마디만 하고 숙연하렵니다.

이명박 대통령께 묻습니다.
언론의 보도대로 정말 그렇게 비통하고 애석하십니까.
혹시 앓던 이 빠진 기분은 아니십니까. 제가 보기엔 그래 보입니다만.

대한민국 민주주의 수준이 자유당 시절로 회귀하였으니, 그 시절을 빗대어 한 말씀 올리지요.

"각하, 정말 시원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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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원권 지폐의 발행이 사실상 백지화 되었다고 한다. 이 상황을 두고 우리나라에서 아직 10만원권 발행은 시기상조이며, 5만원권 발행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나, 고액권을 발행하느니 차라리 화폐개혁을 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10만원권 발행이 취소된 것은 그 모델이 현 정부가 빨갱이로 매도하는 백범 김구 선생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청와대와 뉴라이트가 백범 선생을 10만원권 모델로 탐탁치 않아 한다는 한국은행 관계자의 말이 있었다고 하는 걸 보면,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요즘은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면, 특히 그 일이 정부의 결정이라면, 그 결정에 대한 기대와 효과를 가늠하기 이전에, 그 결정이 어떤 이념을 근거한 것인가부터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한갖 지폐모델까지 이념의 잣대로 재단하는 현 정권과 보수층이 지닌 가치관의 후진성이 무척이나 안쓰럽다. '김구포비아'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과도한 현 정부의 김구에 대한 혐오는 흡사 흥선대원군의 척화비를 보는 것만큼이나 갑갑하기 그지 없다.

이명박, 이념의 척화비를 세우다.

오늘은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작년 이 맘 때쯤 이명박 당시 후보는 다른 건 몰라도 경제만큼은 확실하게 살리겠다고 말했었다. 1년이 지난 지금, 다른 건 몰라도 경제만큼은 확실하게 죽여놓은 것 같다. 하지만, 현 정부가 죽여놓은 것이 어디 경제뿐이겠나. 그와 다른 이념의 궤적을 가진 사람들 역시 모두 다 목숨을 걸어야만 한다. 일단 현 정부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은 온전히 살아남기 힘들게 되었다. 자신의 생각으로 인한 파장을 염려하기 이전에 자신의 사법처리 여부를 고민해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18세기 로베스피에르는 21세기 대한민국에 다시 환생한 듯 여전히 살아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18세기에 급진진보세력이었던 그가 21세기에는 강경보수세력으로 이념의 변화를 보이는 것 뿐이다.

로베스피에르가 환생한 21세기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2008년은 '이념'이라는 단어없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한 해가 되었다. 대통령 선거로부터 시작된 이념논쟁은 교육감 선거를 거쳐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문제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것만 따져봐도 정말 그 파장이 엄청나다. 90년대에 이미 종말을 고한 이념논쟁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하고, 왜 우리는 이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나 하는 괴로움도 그 부끄러움과 함께 하고 있다. 그들은 '잃어버린 10년'을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 하지만, 다수의 국민들은 노래방에서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을 부르고 있다는 걸 아는지. 세기를 넘나드는 현 정권의 회귀본능은 1년내내 우리의 말문을 막아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보다 더 심각한 건 그런 그와 함께 앞으로 4년을 더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 첫 해의 업적이라면, 이렇듯 이념의 척화비 건립과 로베스피에르의 환생으로 대표되지 않을까. 이념의 척화비를 세운 한국의 로베스피에르. 4년 후 이명박 대통령의 이미지가 이와 같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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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 전 일이다.

지난 2002년 6.13 지방선거에 이명박 전 의원이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그가 서울시장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 했었다.
그 이유는 '기업경영'과 '행정'엄연히 다른 영역이기 때문에, 기업경영을 잘했다고 해서 올바른 행정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마치 초등학생이 구구단 좀 잘 한다고 시도 잘 쓰고  운동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 같은 반응에 주위 사람들은 '그는 훌륭한 기업인이며, 동시에 성공한 정치인'이라며 결국 행정의 최고책임자도 정치인이 되는 마당에 정치에서 성공했으면 행정도 잘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제 와서 그들에게 묻는다. 경영을 잘했고, 정치도 성공했다는 그가, 지금 행정을 잘하고 있는지.

정치와 행정은 뭐가 다를까

어떠한 형태, 어떠한 성격의 조직이든 간에 그 조직 내부에 '정치'와 '행정'은 공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정치와 행정을 올바르게 구분해내는 사람들은 흔치 않은 것 같다.
 
정치-행정 이원론을 주장한 윌슨의 주장이 정치학에서 행정학을 분리한 최초의 시도라고 한다면, 정치와 행정은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나, 최근에는 '의회 중심의 행정'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정치와 행정이 완전히 분리된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이렇다보니, 정치와 행정에 대한 경계 자체도 모호해지고, 정치인이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가는 모종의 아이러니(?)도 발생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조직 내에서의 정치와 행정은 어떠한 함수관계로 맺어져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학문적 고찰은 도처에 존재하고 있으며, 이론적으로 그 의미가 명백하게 정리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되나, 실무 차원의 논의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우선 정치는 행정에 비해 더 '인정적'이다. 오늘날 행정의 커다란 병폐요인 중 하나가 '온정주의 문화'인데, 이 역시 행정가들의 정치적 행동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들에게 일의 과정이나 성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인맥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을 꽤 중시한다. 지나치게 되면 편가르기가 된다. 소위 보스기질을 가진 이들이 대체로 정치를 잘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람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일만큼 인간사회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내 사람 챙기기'만 잘 해도 정치는 거의 성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두환이 그렇지 않은가.
 
문제는 이들의 정치력은 조직의 성과와 무관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이 내 사람 챙기는 일에 급급하게 되면, 업무의 절차나 과정은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논리는 단편적이고 근시안적 시각을 강요하게 되고, 이에 따라 조직의 목표는 갈 길을 잃고 표류하게 된다.
구성원에 대한 평가 역시 조직 내의 업무성과와는 별개로 조직 수장과의 인간 관계에 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구성원의 조직 장악은 조직 목표 수립에 적잖은 부담이 되기 마련이다.

행정은 정치가 지닌 이러한 병폐에 확실하고 근본적인 처방을 제시한다. 우선 행정은 조직성과중심의 관리를 인맥보다 우선시한다. 행정담당자의 리더십 역시 관리차원의 성격을 벗어나지 않는다. 능력에 따른 차별은 '차별'이 아닌 '구별'로 인식하며, 여기에 '성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프로스포츠에서 선수의 기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아무리 뛰어난 상품성을 지닌 선수라도 본 경기에 투입하지 않는 것처럼, 행정차원에서의 조직운영은 어찌보면 '비인간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행정의 궁극적 목적은 조직성과의 향상이다. 구성원을 조직의 한 부속처럼 여기는 인간소외의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행정도 인간의 행동인 바, 정치적 요소가 완전 배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올바른 행정은 인정에 얽매여 조직전체에 해를 끼치는 일은 범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하나는 한 조직 내에 반드시 정치와 행정은 공존해야 한다는 사실이며, 또 하나는 대부분의 인간은 행정보다 정치를 더욱 더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행정에 비해 더 인정적인 정치가 사람들의 선호를 받는 것은 어찌보면 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호적인 정치에 치중하여 행정을 등한시하게 되면 조직 내의 정치와 행정의 균형은 깨어지고, 조직은 그 목표달성을 위한 험난한 장애를 조직내부에서부터 맞닥뜨려야 한다.
 
조직을 위한 바람직한 조직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조직 내부의 정치, 행정에 대한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것은 조직의 수장이나 구성원의 대부분이 정치(행정)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면, 스스로 그 성향에 맞춘 행정(정치)적 성향을 보여주는 유연함이다.
 
더욱이 정치가 인간에게 더욱 친숙한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행정적 성향을 버리지 않는 희생은 조직의 목표달성을 위한 커다란 동인이 아닐 수 없다.
 
정치와 행정, 그 공존의 딜레마

정치란 마약과 같은 것이어서, 한번 맛을 들이면 쉽게 헤어나오기 어렵다. 하지만, 정치는 또 인간에게 호의적인 관계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반면에 행정은 보약과 같은 것이어서 한번 맛을 들이기는 쉽지 않고, 비 인간적 성향으로 말미암아 내부 구성원에게조차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행정은 그 구현에 시스템적 사고를 요구하는 바, 매우 복잡해 보이지만, 근본 목적에 충실한 관계로 중심이 흐트러지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또한 시스템적 사고를 통한 조직운영의 테크닉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묻는다. 정치를 알고 행정을 아는 상황이라면, 당신들은 당신들의 조직 내에서 정치지향적 인물이 될 것인가, 행정지향적인 인물이 될 것인가. 어느것이 더 가치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선택은 당사자 스스로가 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정치 또는 행정 둘 중 하나만 알고 정치나 행정을 하는 사람이나, 행정을 모르고 정치를 하는 사람 가운데(정치를 모르고 정치를 할 수는 있다. 쉬운 일이니까) 제대로 된 결과를 내는 사람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설령, 만족스런 결과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 결과가 모두에게 '보약'같은 존재가 되는 경우 역시 보지 못한 것 같다.

마약같은 정치(政治)와 보약같은 행정(行政)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6월 9일 자신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을 비롯한 원로들과의 대화에서 "내가 경영과 행정은 알았는데 정치는 몰랐다."고 했다고 한다. 그가 성공한 기업인이라 하니, 경영을 안다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그가 행정을 알았을까 하는데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수가 없다. "내가 경영과 행정은 해봤는데, 정치는 안해봤다" 이랬다면 또 모르겠다. 그렇다쳐도 국회의원 지내놓고 정치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된다. 어차피 인간은 정치적 동물 아니던가.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후 현재까지의 모습을 보면 그는 경영과 정치는 아는데, 행정을 모르는 사람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정치와 행정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논어의 이인편에 '아는 것을 아는 것,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 했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그런 점에서 스스로의 현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몰라도 할 수 있는 마약같은 정치를 해보고 난 후, 서울시장 한번 거치고 나서 행정을 안다고 하는 오만함. 오늘 현재 이명박 대통령을 힘들게 만든 주범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맨 처음 현대건설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초심을 청와대에까지 가져다 놓았다면, 정말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무슨 일을 하면 욕을 먹던 노무현 대통령보다 더한 멸시를 받는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을 바라보는 측은함과 함께 한숨으로 엉켜 나오는 요즘이다.

국민은 보약같은 대통령을 원한다는 걸 알 수 있도록, 이명박 대통령의 조속한 해독을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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